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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부원장의 공식적 이력은 Y대 수학과 학사였지만 실제로는 그 학교를 중퇴했을 뿐이었다. 그녀 학력의 비밀을 일부러 알게 된 건 아니다. 원장은 시장에서 간식을 곧잘 사 와서 나눠 먹고는 했다. 언젠가 떡볶이인가를 씹으며 원장과 부원장과 셋이 교무실에 앉아 있었다. “사실 이 사람이 졸업을 못 했어요. 중퇴에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보니 부원장의 강의력이 좋다는 소리였다. “이 사람이 수업을 얼마나 잘하기로 소문이 났으면 대치동에서 전화 오고 난리가 나요, 오라고. 그런데도 여기 시장통에 나랑 제대로 한번 해 보겠다고 온 거예요. 학교 졸업을 못 했어도 그런 건 강의하는 데 아무 지장 없어.”

원장은 부원장과 십 년 가까이 일했다. 망신을 주겠다거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저의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실력을 칭찬하기 위한 근거라면 민망한 사실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낼 뿐이었다. 원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부원장의 중퇴 사실은 이후에도 그녀를 높이는 듯 낮추는 듯 아리송하게 쓰였다. 이런저런 기만이 그 세계의 보편이었다 해도 원장이 타인에게 무감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나는 당황해서 부원장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엷게 웃으며 눈을 오른쪽으로 내리깔고 있었다. 그날로부터 부원장을 대하는 게 약간은 민망해졌다. 학력이 그렇다고 그녀를 경시한 건 아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새파랗게 어린 내가 불편하지 않을까 해서였다. 몰래 들었으면 모를까.

얼마 안 되어 부원장과 수업 일정으로 상의할 일이 있었다. 학생이 아파서 그 주 수업이 취소되었는데 다음 주 언제로 옮기겠냐는 것이다. 나는 수업보다 삼십 분 일찍 도착했고, 우리는 가장 작은 교실에 마주 앉았다. 원장실은 있었지만 부원장실은 없었다. 그녀 앞에서 탁상 달력과 휴대폰의 일정을 번갈아 보며 날짜를 확인하는데, 그녀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사탐쌤이 올해 몇 살이세요?”

“네? 이제 스물넷이네요.”

“빨리 군대 갔다 오셔야겠네요.”

어디서 일을 구하든 병역 미필이란 말을 굳이 한 적이 없었다. 채용에 마이너스일 뿐이니까. 하지만 넘겨짚어서도 그래 보이는 모양이었다. 거 참 그 얘기 들을 때마다 백 원씩 받았으면 밤마다 원장님 전화 받을 일도 없었겠네요, 라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하기야 “천천히 가셔도 돼요.” 보다는 “빨리 다녀오세요.”가 좀 더 진실에 가깝고 도움이 되는 말이다.

그나저나 이 말에는 무슨 함의가 있을까. 언제 그만둘 거냐는 얘기일까.

“제가 당장 군대에 갈 생각이 아니에요. 최소한 일 년은 여기 있을겁니다.”

거짓말이었다. 가능하다면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룬 것이 없단 미련에 입대를 망설일 뿐이었다. 내 노파심을 꿰뚫은 것인지 내 거짓을 꿰뚫은 것인지 그녀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어차피 선생님 말고 이렇게까지 수업 커버하는 분이 없으세요. 고급인력이셔요.”

말씀이라도 감사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건 진심이었다.

“얼마나 더 하실 생각이세요?”

“네? 군대 가기 전까지는 해야죠?”

“그게 아니고, 그럼 제대하면 안 하실 거에요?”

“네?”

“올해 입대하셔도 제대하면 스물여섯이네요.”

그녀는 부모님도 감히 언급하지 않던 입대 문제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앞에서 나는 ‘네무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아픈 델 건드리는 의도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 같아선 실없는 소리라도 했겠다. 근데 제대는 예비군이 끝나야 제대고요, 현역 복무를 마치는 건 전역이랍니다. 몰랐죠? 하지만 나도 그때는 제대와 전역이 같은 말인 줄 알았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고 불쾌함을 티내는 사이, 부원장이 다그치듯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니…”

부원장은 내가 입고 있던 외투에 턱짓했다.

“전공이 연극이시잖아요.”

턱짓을 받은 왼쪽 가슴에는 학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등판에 학과 이름이 크게 적힌 학교 돕바였다. 겨울옷을 사는 대신 술값을 냈기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학력에 거리낄 것 없이 없다고 여긴다는 것 또한 틀린 건 아니었다. 턱짓의 목표를 알자마자 부끄러움이 일어났고, 반발심은 그보다 더 크게 일어났다.

“전공이 그래서 그런가, 목소리가 우렁차셔서 뒤 강의실까지 다 들려요.”

“네…”

“수업할 때 다른 얘기로 많이 빠지나봐요? 애들이 재밌다고 좋아하더라고요.”

“아 그런가요, 지루해할 때 가끔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비꼬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꼬는 것이 그녀의 의도인가.

“수업 시간에 문제 풀게 해 놓고 전화 받으러 가시고, 나갔다 들어오시는 것 같은데…”

내 근무 태만이야 내가 더 잘 알았으므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선선히 대답하기보다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침묵이 꼭 인정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아주 정반대로 생각하던 것이다. (이 무렵 심리테스트 사이트에서 측정한 나의 객관성 지수는 94.3점, 사고력 지수는 75.8점이었다.) 나는 말꼬리를 흐리는 대신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제 말은, 처음부터 학원 강사 하는 게 꿈이셨어요?”

“무슨 그런 사람이 어딨습니까?”

방어를 준비하다 보니 본심이 삐져나왔다. 나도 내 말에 놀랐다. 부원장은 동요하지 않았는데 이때부터는 힘없이 말을 이어갔다.

“열심히 하시라고 이런 말 하는 건 아닌데요. 여기 선생님들, 다 십 년 가까이 여기 출근하시는 분들이에요. 그분들 다 그랬어요. 월요일마다 오는 국어쌤은 사시 2차가 안 됐고, 수학쌤은 연습생이었다고 하고. 나도 학교 그만두고 뭘 하겠어요? 아버지가 소개해서 겨우 원장님도 알게 된 거예요. 실패자들이 모인 곳이죠. 처음부터 이걸 하려고 했던 사람은 없겠죠.”

나는 눈을 내리깔고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렇다고 끝까지 해 본 사람도 없는 것 같기는 해요.”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한숨같기만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죽도록 노력해 본 사람은 없어요. 그냥 눌러앉은 거예요. 바쁘고 메뚜기 뛰어도 돈은 많이 들어오니까. 젊을 때부터 그렇게 벌 수 있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랬던 것 같고요.”

그렇게 말하는 부원장은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적막이 이어졌다.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했네요. 수업 도중에 적당히 나갔다 오세요. 애들이 다 알아요.”

정적은 부원장이 깼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거에요?”

“글쎄요, 연극을 해야 되나…”

“아뇨 화요일 수업이요, 언제로 옮기실 거에요.”

 

나는 부원장이 한 말을 대강 알아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민거리 같은 것을 넘겨준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의미를 제대로 곱씹지 못했다. 듣기보다 들은 뒤 내놓을 대답이 더 중요한 것이 나의 모든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구름처럼 흐려지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부원장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까지는 특정한 경험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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