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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연극은 두 달 동안 준비했고 나흘 동안 공연했다. 예상대로 버거운 일이었다. 워크샵은 금전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고, 나는 열 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와 소통하는 것에 서툴렀고, 극의 배경, 대본, 소품, 음향, 극장 대관, 연기까지 모든 걸 꿰고 있어야 하는 내 위치가 대단히 부담스러웠다. 장면(Scene)이 뭔가 이상한데 해결할 능력이 없었고, 한계를 느끼는 배우에게 어떻게 조언해야 할지 몰랐다. 조연출이라도 해 봤으면 좀 달랐을 것이다. 학교를 떠난 것을 그때만큼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론은 즐거웠다고 하는 편이 정직할 것이다. 책상에 앉아 작품을 분석하는 첫 단계는 유쾌했다. 대사를 뜯어보며 감정을 끄집어내고 글자 너머 몰랐던 행동을 알아보는 일은 골치 아프지만 공부하는 성취감을 줬다. 책상을 치우고 연기와 움직임을 지켜보는 것도 나날이 행복했다. 두루뭉술한 나의 연출을 기막히게 흡수하는 것이 다행스러웠고, 재능 있는 동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감사했다.

공연 준비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그 가운데 그걸 깨달은 건 무대 설치가 끝난 날, 그러니까 공연 일주일 전이었다. 배우들은 모두 본업을 갖고 있었고 그만큼 시간이 없었다. 무대가 만들어지자마자 리허설을 했다. 끝나고 보니 새벽 한 시였다. 극장이 있는 혜화동에서 집에 가려면 두 시간은 족히 필요했다. 다음 날도 아침부터 예정된 연습 생각을 하려니 더욱 피곤했다. 그런데 먼지투성이 반지하 극장을 빠져나와 기지개를 켰을 때 가슴 속으로 아주 반가운 포근함이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보는 봄밤 대학로의 공기였다. 나는 이 향기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

극장에서 팔을 걷어붙였던 스웨트셔츠 밑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몄다. 사위가 어둑하면서도 아침에 안개가 필 것처럼 은근하게 하얘졌다. 그 사이로 드문드문 지나가는 로터리의 자동차들, 빨간 벽돌의 극장과 오래된 가로수들, 지하에 숨어 있는 작은 극장들, 사거리 횡단보도에 선 검은 돕바들 같은 것. 그것은 3년 전 걸어 내려오며 외면하던 풍경이었다. 몇 년 동안 고개를 수그린 채 이어폰으로 무장하고, 가능한 응시하지 않으려고 했던 익숙한 대학로였다.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여전했지만, 굳이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주 천천히 그 거리를 내려와 4번 출구 앞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모든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사당역으로 가는 택시에서 한강을 건널 때, 할증 걱정이 아닌 내일 해결할 장면 걱정이 났다. 나는 거의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서울을 오가는 것이 즐거웠다.

 

나흘째 마지막 공연이 끝났다. 학교 동기 한 명이 찾아와 공연을 보고 꽃다발을 들려줬다. 평소 연락도 잘 없었는데 고마운 일이었다. 배우도 아닌 스태프가 꽃을 받는 게 민망했지만, 야릇하게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도 받을 일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일이 있다면 좋을 것도 같았다.

포장 종이가 바삭거리는 꽃다발을 술집 구석 어디에 놓고 기나긴 뒤풀이를 했다. 해가 뜨도록 술을 마셨다. 화장실에서 바지 지퍼 잠그는 것도 버벅거릴 정도로 취했었지만, 꽃다발만은 챙겨서 나왔다. 들여다보니 꽃이 샛노란 게 점점 더워지는 이맘때 철이 맞는가 싶었다. 물론 무슨 꽃인지 이름도 몰랐다.

서울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자리에 털썩 앉자마자 눈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너무 오래 잤다는 느낌에 소스라치듯 깼다. 열차는 전혀 낯선 곳을 달리고 있었다. 바다 냄새가 나는 것 같더니, 곧 대천역이었다. 어찌어찌 표를 다시 끊고 상행선을 탔는데 이번에도 졸았다. 깨어보니 내릴 역에서 막 지난 참이었다. 거기서부터는 내 자리에 주인이 따로 있었다. 자리를 비켜줄 때까지도 쥐고 있던 노란 꽃다발이 참으로 민망하게 바스락거렸다. 무궁화호 4호차 입석 칸에 걸터앉았다. 해장할 물 한 모금이 간절했지만, 자판기는 고장이었다. 잠은 완전히 달아나 있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세수한 뒤 창밖만 봤다. 숙취가 들러붙어 부은 얼굴이 희미하게 비치는 게 가관이었다. PDA를 든 여객전무가 검표를 했다. 수원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졸았네요… 모바일 티켓을 보여주며 머쓱해하는데, 그녀의 시선이 휴대폰 화면보다 좀 더 아래로 갔다. “어, 프리지아네요?” 이게 프리지아였구나.

고백하자면 기차에 놓고 내릴까도 생각하던 거였다. 꽃에는 본래 관심도 없고 내 고질적 비염 탓에 향기에서도 별 매력을 못 느꼈다. 하지만 이름을 안 이상 버릴 수는 없었다.

기차가 어느새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바라보는 창문은 달리는 방향 왼쪽이었다. 철교의 녹색 구조물이 스치는 뒤편으로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이 지나갔다. 여의도와 그 뒤편 합정역. 붙잡을 것 없이 우울했던 시절 멀거니 바라본 야경이었고, 미지근하게 좋았던 기억으로든 찌를 듯이 아팠던 마음으로든 활보했던 곳들이었다. 63빌딩, 또 무슨 빌딩들, 그 뒤로 메세나폴리스, 세아타워. 비슷해 보이지만 윤곽을 선명히 분간할 수 있었다. 아주 맑은 날이었다. 하늘빛을 닮은 강물이 그 밑으로 파랗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스물넷의 5월이었다.

 

독일 사람은 걷기 전에 생각한다. 낭떠러지가 있으니 이 길로 가지 말아야지.

프랑스인은 걸으면서 생각한다. 낭떠러지가 있으면 피해서 가면 되겠지.

그런데 영국인은 걷고 나서 생각한다… 이미 절벽 밑으로 떨어진 다음에야.

아주 오래전 들었던 비유다.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언젠가 긴요히 써먹을 작정에 적어 두었었다. 이게 머리에 유독 오래 남은 건,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걷고 나서 생각하는 부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십오 년간 냉정한 독일인이 되려고 했다. 최소한 낭만적인 프렌치라도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앞서 머리 굴린 궁리들은 치밀하지도 않았고 운 좋게 들어맞는 것 없이 모조리 빗나갔다. 임기응변의 성공률마저 그다지 높다고 볼 수 없었다. 나는 영국인에 가까운, 스킨헤드 훌리건 막무가내의 인간형이었다. 물론 나는 지금은 헐려 사라진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출신이지만, 아무튼 이미 조져놓은 일들을 수습하는 게 해야 할 일의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하여, 나에게는 걸으며 얻은 깨달음보다 여정을 돌아보며 얻은 상량이 더 많았다. 나의 스무 살부터 스물넷까지가 돌아봐야만 의미를 알 수 있는 부침으로 가득하던 것이다. 나의 이십대 초반은 그러하였다.

몇 년간 무엇이든 하려고 했고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고,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꿈은 잡히지 않았고 실패가 일상이 되었다. 항상 있던 괴로움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거의 모든 것에 주저했고 자신을 잃어버렸다. 잘난 아이들을 질투했으며 그들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찾아내 자부심으로 삼았고, 그것을 장담하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징그러웠다.

컴플렉스 투성이로 살았다. 가난이란 컴플렉스, 가족이란 컴플렉스, 외톨이라는 컴플렉스, 비주류라는 컴플렉스. 어디서든 무엇에든 당당할 수 없도록 만든 컴플렉스. 밑에 깔려서 버둥대는 투견처럼 또 어딘가에서 싸우고 떠나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컴플렉스. 언제 다가올지 모를 역전의 기회를 꿈꾸기만 했던 지독한 컴플렉스. 근성과 혈기로 솟아나기보단 자기연민과 열등감과 열패감의 발로로서 터져 나오며 그것이 원인인지 결과인지도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그 언더독 컴플렉스.

그 결과, 나는 취한 얼굴로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을 쥔 취객이었다. 그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꽃 이름이나마 누가 지적해서야 안 것이며, 기차 안에서 제 몸 하나 못 가누는 한심한 이십대였다.

다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나의 많은 것이 부끄럽다. 가벼운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다. 함께 있어도 혼자 생각한다. 좋지 않은 추억을 종종 회상하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편이다. 나는 여전히 강박증에 시달린다.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쉽게 공유하지 않는다. 형제가 있냐는 질문이 두렵다. 여전히 강등권을 오가는 축구팀 뉴캐슬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제 과거와는 달리 그 사실이 밉지 않다.

그 역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프리지아는 어울리지 않더라도 나에게 건네진 꽃이었다. 사마귀처럼 올라앉은 컴플렉스 역시 가지고 살 운명인 것이다. 나는 올려다보는 내 모습이 좋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을 대표하여 가장 높이 가는 것보다는 내가 믿는 것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다. 이제 오늘의 나를 직시할 수 있다. 흐리게 선망하던 미래를 재정립하고, 너저분한 실패로 점철된 과거를 돌아보되 후회하지 않는다. 어려울 때 의지할 어제의 우상들은 마음에 깊이 남겨두겠지만, 그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여 이 지지부진한 이야기와 본인의 삶에 기시감을 느낀 동료들이 있다면 깊은 위로를 드린다. 어떻게들 참고 사셨나.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구질구질한 청춘의 단면, 그걸 말하는 것은 우리 같은 컴플렉스 덩어리들의 몫이다. 가난과 아싸마저 훔쳐 가 기만하는 건방진 중산층들의 몫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배우 지망생이며 코미디언을 꿈꾸고 멋진 극본을 쓰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나는 이 나라 배우를 대표하는 얼굴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 코미디언을 대표할 만큼 말발을 타고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매년 쏟아지는 대단한 작가들의 글솜씨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대가 조금이라도 공감했다면 당신의 삶을, 오늘 우리의 모습을 조금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그게 자랑스럽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건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프리지아를 꽃병에 꽂아두었다. 시들기 전까지는, 살려서 키워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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