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머리, 가슴, 발끝으로 스페인 여행기를 연재하신 나희성 님이 안식월을 맞아 떠난 쉼의 기록을 적어 내려갑니다. 새 연재 “안식월, 쉼표 하나”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오랜만에 찾은 수원, 그 중에서도 가볼만한 곳은 기득권층에 휘둘려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던 정조와 정약용의 못다한 꿈이 묻혀있는 수원화성과 수원행궁 그리고 그곳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는 행리단길의 카페거리다.

 

기나긴 장마 뒤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오후, 나는 벼르고 기다리던 이 곳을 찾았다. 수원화성과 행리단길로 유명한 이곳에 잘 알려지지 않은 기념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바로 ‘나혜석 생가터’.

 

여자는 남자에게 밥을 얻어먹으니 남자와 평등이 아니요, 해방이 없고, 자유가 없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이는 오직 남자가 벌어오는 것만 큰 자랑으로 알 뿐이요, 남자가 벌어오도록 옷을 해 입히고 음식을 해 먹이고, 정신상 위로를 주어 그만한 활동을 주는 여자의 힘을 고맙게 여지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1926년 동아일보, ‘생활 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중에서)

이 나라 여성운동의 시작, 한국 페미니즘의 효시이라는 ‘나혜석’

그는 이 곳 수원의 갑부집 딸로 태어나 오빠들과 함께 일본에 유학을 갔다. 이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영예를 얻었고,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남편을 만나 1920년대 당시 여성으로 꿈도 꿀 수 없었던 유럽과 미국대륙을 여행하고 파리에서 유학한, 한마디로 금수저 중에 금수저였다.

세상의 부귀와 영예속에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나혜석, 그러나 그림과 함께 그녀를 문단에도 등단시킨 특출난 글재주는 자신의 안위가 아닌 당시 부당한 차별로 고통받던 여성들을 위해 쓰여져 버렸다.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도쿄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이혼고백장’에서)

남성사회에 저항하는 나혜석의 외침은 결국 타락한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으로 돌아왔고, 명예, 건강, 가족, 친구 모두를 잃은 채 행려병자로 떠돌던 그녀는 이름도 무덤도 없이 사라져 가야했다.

뒤늦게 많은 이들이 ‘나혜석’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수원시도 부랴부랴 실제 생가인지 알 수 없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아직도 여성으로 살아가는것이 고달픈 이 나라를 지켜보고 있을 그녀의 고독한 원혼은 위안을 얻었을런지…

* 현 생가 위치는 나혜석 작은 오빠의 집터였다고 한다. 실제 생가의 정확한 위치를 아직 모르나, 아마 이 근처 어디일 것이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수원시가 조성한 ‘나혜석 거리’는 그녀의 삶과 전혀 무관한 장소인 수원시청 근처에 조성되어 있다.

 

골목 안, 어느 카페를 찾았다. 여기엔 옥상이 있어 바깥을 더 잘 볼 수 있다는 말에 조그마한 계단을 통해 루프탑으로 올라가 보았다.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탁트인 시야로 수원성 안쪽의 한옥마을 골목골목이 들어온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나즈막한 높이의 수원성벽은 이 마을을 포근하고 너그러이 끌어안았을 것이다. 수원성벽의 품안에 있는 골목 어귀에서 문득 어디선가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계집애는 그런거 하면 못써’

‘여자라고 왜 못하는데요’

걸음의 끝에서 나혜석을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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