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도원의 음악과 사회 청년, 그리고 어떤 편협한노래

 

나도원(음악평론가, 노동당 경기도당 공동위원장)

★ 음악듣기(뮤직비디오) : 권나무 <이건 편협한 사고>

https://www.youtube.com/watch?v=xI7sTh_9hYg

 

돈이 없이 산 사람들, 싱겁게 먹질 못하구요

돈이 없는 집에 자란 아이들, 싱겁게 먹질 못하네요

힘이 없이 산 사람들, 눈물 마를 줄을 모르구요

힘이 없는 집에 자란 아이들, 제 눈물 닦을 줄은 모르네요

내일만 생각하고 살다가 청춘을 허비하고

세상이 지운 빚을 갚다 내 빛을 잃고

이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줄 모르고

저 창문만 바라보네

– 권나무, <이건 편협한 사고> 2절

 

젊은 음악인의 어떤 노래에서

싱어송라이터 권나무가 발표한 《그림》(2014)은 애잔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선율을 품은 포크 앨범이다. 그는 지금도 학교에서 초등학생을 가르치면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묘하게도 제주도 여행을 가서 해변을 걷던 2015년 8월 6일 밤, 아무런 사전정보나 약속도 없이 마침 해변에서 공연하던 그와 마주친 적이 있다. 한껏 반가움을 표하는 중에 어떤 노래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이야기도 건넸다.

그 노래, <이건 편협한 사고>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여겨볼 수 있다. 우선 동일 화자가 스스로 “이건 편협한 사고”일 수 있다고 남기는 독백이다. 그렇지 않다면 “돈이 없이 산 사람들”로 시작하여 “제 눈물 닦을 줄은 모르네요”까지 이어지는 부분은 타인의 이야기이고, “내일만 생각하고 살다가”에서 “저 창문만 바라보네”로 마무리되는 코러스 부분은 화자의 덧붙임이다. 이렇게 달리 보는 이유는 1절의 노랫말에는 정말로 편협한 생각도 들어있기 때문인데, 만약 그렇다면 아래의 “강 건너 불구경만 하다가”에서 “저 창문만 바라보네”로 마무리되는 코러스의 뉘앙스도 달라진다.

 

돈을 많이 갖고 산 사람들, 눈물 흘릴 줄은 모르구요

책을 많이 읽고 산 사람들, 책을 찢을 줄은 모르네요

예쁜 애인이 있는 사람들, 뭐가 예쁜지는 모르구요

신을 많이 믿고 산 사람들, 자기 탓은 할 줄 모르네요

강 건너 불구경만 하다가 청춘을 허비하고

세상이 지운 빚을 갚다 내 빛을 잃고

이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줄 모르고

저 창문만 바라보네

– 권나무, <이건 편협한 사고> 1절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있다. 이 곡은 노래를 읽는 것이 아니라 들을 때에 비로소 특별한 울림을 갖는다는 사실이며, 다른 측면에서 노랫말에 대한 상이한 해석 중 어느 편이 맞든지 당시의 창작자들, 특히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태도를 발견하게 되는 지점이다. 상실과 체념, 연민과 분노는 대중음악의 100년사를 관통하는 정서이다. 그러나 구체화 된 실상을 거리낌 없이 화폐와 사정을 직설하며 개인의 정감을 넘어 사회구조를 의식하고, 그러면서도 정의감이라든지 소명감과는 다르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노래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경향이 동시다발로 나타난 시기가 있으니 2000년대 이후, 좀 더 짚어 말하면 2010년 전후이다.

열거할 수 있는 예가 워낙 많지만, 앨범 제목 덕분에 ‘이상헌의 여행하는 사람들’의 《술 처먹는 세대》(2009)를 언급할 수 있고, ‘브로콜리너마저’의 두 번째 앨범 《졸업》(2010)도 떠올려볼 수 있다. ‘브로콜리너마저’는 20대 청춘의 일상과 고민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소박한 음악 취향과 아마추어처럼 보이는 면모를 감추지 않았는데, 타이틀송인 <졸업>에서는 대학졸업생들의 불안과 고민을 노래하고 “이 미친 세상의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하라고, 잊지 않겠다고 노래했다. “이 미친 세상의 어디에 있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쓰고 나면 세대를 중심으로 글을 풀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전개할 생각이긴 하지만, 미리 확인해둘 필요는 있다. 1990년대는 물론이고, 1970~80년대 주요 음악창작자들의 연령대는 어떠했는가. 그 이전 음악동네의 ‘영웅들’은 또 어떠했는가. 그들은 대부분 20~30대였고, 음악 인생에서 새로운 창작을 왕성하게 펼치는 시기가 대개 그때인 것을…. 결국 청년의 이야기가 시대를 대변하고 대표하게 되기 마련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앞서 끄집어낸 태도와 방식이 한때 유행한 세대론 차원이 아니라 보편의 공감대를 얻는 수준으로 확장되었다는 데에 있다.

 

화나는 시대, 이 빌어먹으라는 세상

2016년 1월 22일, 서울고용노동청에 근로감독관의 업무태만과 고용노동부의 업무 소홀에 대하여 집단민원을 제기하러 항의방문 한 모 노동조합 조합원 57인과 시민 2인이 경찰에게 집단연행을 당했다. 20대 청년이 대부분인 조합원들에게 씌운 죄목은 업무방해와 퇴거명령 불응 등이다. 당시에 청년을 위한 정당이라 자처하는 현수막으로 전국을 도배하고 있던 여당-새누리당이 말하는 청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청년일자리를 염려한다는 청와대에게 청년은 대관절 누구인지, 고용주 편에서 노동자를 외면하고 (추억의) ‘양대 지침’을 발표한 고용노동부는 무엇을 하는 부처인지 모를 일이었다. 걸핏하면 시민을 연행하여 구금 제한 시간 48시간을 굳이 채우는 것을 당연시하고, 툭하면 구속과 벌금으로 압박하는 경찰과 검찰은 부자감세를 만회하는 재정기구를 자처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무렵, 2015년 말 통계에 의하면 한국 노동자의 평균 연소득은 3,200만 원 정도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8,000달러 가까이 되었으니 환율에 따라 환산하면 얼추 비슷한 평균처럼 보이지만, 심각한 착시이다.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한 ‘1인당’ 국민소득과 가구당 1~2인이 경제활동을 하는 현실에서 비슷해 보인다면 문제가 큰 것이다. 당시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 임금노동자 중 하위 50%의 평균 연소득은 2,000만 원 이하이고, 상위 10%가 금융자산과 부동산자산의 66%를 가지고 있으며, 하위 50%의 자산은 2%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언론에 보도되었다. 또한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가져가고 있다. 당시 기준으로 20년 전인 1995년에는 30%에 가까웠고(29.2%), 2005년엔 40%로 더 커지더니(37.8%), 2010년을 넘기자 절반에 육박했다.

또 당시 국세청 자료에 의하면 연소득 2,000만 원 이하 노동자가 47.5%에 달하고, 전체 노동자 중 절반의 월 소득이 166만 원 이하이며, 갈수록 늘어나는 비정규직은 한 달 평균임금이 143만 5천 원이다. 게다가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어 3년 후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비율은 22.4%에 불과하다. 더 기막히게도 하루 10시간에서 12시간씩 일하고 100만 원 남짓 받는 사람들, 우리, 그리고 바로 내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 모든 실상은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 거의 그대로이거나 더욱 악화하고 있다. 매번 정부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해야 신규 채용을 늘릴 수 있다 주장하고, 시간당 최저임금을 올리면 중소기업이 어려워진다고 하며, 재벌은 그대로 두고서 ‘노동개혁’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경제가 어려워져서 청년일자리도 만들 수 없다고 협박했다. 일자리 창출을 공언한 정부들은 일자리를 줄이는 공기업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사실상 아르바이트인 인턴을 떡 던져주듯이 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세상’을 넘어 ‘빌어먹으라는 세상’에 대한 불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흉악범죄에 대한 대중의 증오가 (범인으로 밝혀지기 전) 용의자라는 인격에게 전가되는 것처럼, 특별한 인격들(대통령 등의 권력자 개인)과 586처럼 범주화된 집단인격에게 돌아가곤 한다. 선거에서도 보수양당 지지자들은 어느 정도의 증오와 공포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대표인격을 악마화하고 언론은 늘 이 구도로 관심도를 편성한다.

 

뒷자리의 분노

공간에도 권력이 있다. 회의석상에는 참석자들을 조망할 수 있는 의장석이 있다. 비슷하게 교실에서 학생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는 교단을 제외하면 맨 뒷자리이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밀어내기와 쟁취가 자리다툼이라면, 평등성을 위한 재배치는 구조개혁이다. 문제인식의 차이는 이 두 가지 입장에서 나온다. 아직도 일각에선 청년세대가 정당한 권리와 보상을 요구하면 휴가철 공항에서 비행기 입석표를 요구하는 관광객이나 신발가게에서 구두 한 짝만 팔라고 떼를 쓰는 손님인 양 바라보기까지 한다.

여기까지 편협한 사고를 이어온 이상, 청년에 대한 호명과 선언의 차이로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시대의 청년은 누구일까. 청년문화, 청년정치, 청년예술…, 이러한 호명이 당사자 아닌 이들에 의하여 자주 발화될수록 주체화보다는 대상화의 빈도를 높여왔다. 비교적 최근의 시간을 반추해보면, 이런 식의 논의는 청년세대의 정치의식에 대한 훈계조 논박이 이어질 때 절정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의 정치 무관심과 우경화에 대한 우려는 비단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어서 로버트 레드포드Robert Redford가 톰 크루즈Tom Cruise, 메릴 스트립Meryl Streep과 함께 연기하며 감독을 맡은 <로스트 라이언즈(Lions For Lambs)>(2007)를 통하여 젊은 세대에게 현실인식과 사회참여를 요청하기도 했다.)

정작 청년의 머리에 그늘을 드리우는 건 누구-무엇일까. 쓸모 있는 상품이 되라 강요하고, 생존문제를 세대 간 문제나 운명적 문제로 치부하며, 소수가 권위와 자본을 장악하고서 성과를 요구하는 구도는 누구-무엇의 책임일까. 이 속에서 다수 청년은 더 많은 다수와 만나지 못하고, 성벽 없는 요새에 갇힐 수밖에 없다. 청년을 대상화한 호명보다 당사자의 자기선언, 세대를 넘어 함께 놓인 상황을 공유하는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선언-계급적 선언이 절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이유이다.

 

그것은 경험해본 적 없는 삶의 회복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갇힌 배로, 물줄기 퍼붓는 국가폭력의 표적으로, 정처 잃은 사람과 가족 잃은 가족으로 내몰릴 것이다. 반복하고 싶지 않지만 반복되는 장면(“힘이 없이 산 사람들, 눈물 마를 줄을 모르구요, 힘이 없는 집에 자란 아이들, 제 눈물 닦을 줄은 모르네요”)을 또 견뎌야 할 것이다. 어느 젊은 음악인의 어떤 노래에서 찾으려는 바람은 ‘경험해본 적 없는 삶의 회복’이다.

 

★ 음악듣기(뮤직비디오) : 브로콜리너마저 <졸업>

https://www.youtube.com/watch?v=0jVziDGnN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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