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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잃어버린 30년] 연재를 시작하며

2016년 11월, 박근혜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는 시국에 이 글을 쓴다. 20대 초반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30년이다. 그동안 겨우 이런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허망하고 참담하다.

길게 보자면 역사를 낙관하는 편이다.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태우듯이, 우리의 운동은 지금 비록 초라하지만 언젠가는 부활하고 세상을 불태울 것이다. 아마도 그 ‘언젠가는’이라는 시점은 후대의 몫이지, 나의 몫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훗날을 위해 기록이라도 남기는 것이 나머지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실패한 역사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못난 역사라도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남기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글의 마무리는 어디까지가 될지 모른다. 끝을 정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쓰기 시작할 생각이다.

 


 

세상을 알게 된 두 가지 계기

 

내가 태어난 1963년은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해였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한 1979년에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즉 태어나서부터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나에게 박정희 외에 대통령은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박정희는 동의어와 같았다. 다른 대통령은 상상할 수 없었다. 유신시대에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독재자를 찬양하는 세뇌교육을 받았다.

그렇게 자란 청년이 세상을 알게 된 첫 번째 계기는 광주항쟁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0년 그 당시에는 관제언론의 보도에 의해 진실을 알 수 없었다. 훗날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소박한 분노에 의해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 다른 계기는 1985년의 구로동맹파업이다. 책으로만 배운 자본주의의 야만적 모습을 눈으로 목격했다. 여성노동자들이 구사대에게 폭행당하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는 광경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순간의 무력감과 분노가 세상을 바꾸기 전에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게 했다. 나에게 1987년은 그 두 가지 계기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6월항쟁은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운동권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중이 봉기한 사건이었다. 물론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그 결과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6월항쟁 직후의 고양된 정세 속에서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과거와는 다른 투쟁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이 경공업, 중소사업장, 여성노동자 중심이었던 반면에 87년 대투쟁은 중공업, 대기업, 남성노동자 중심이었다. 2년 전에 체험한 무력감에 비한다면 지게차를 앞세운 중공업 노동자들의 거대한 대오는 통쾌한 반전이기도 했다. 이 또한 훗날에 한계로 작용하기는 한다. 어쨌거나 이 투쟁을 계기로 군사정권 아래서 억눌렸던 노동운동이 분출하고 수많은 민주노조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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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민주 항쟁 29주년 기념 페이지

이러한 내력에 따라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점은 1987년 6월항쟁 직후 부터다. 남들이 대체로 알 법한 시기의 이야기들은 이미 공개된 사실을 중심으로 건조하게 쓸 것이다. 그보다 근래의 일들, 대략 2000년대 이후의 일은 나의 개인적 경험과 관점을 가미해서 기록할 것이다. 따라서 논란도 예상하며 피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쓸 이야기 중에는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 발표한 내용도 포함된다. 그러나 상관없다. 내가 쓴 그 어느 문서도 저작권 따위와 무관하다.


1987년 민중후보운동

 

1987년 6월항쟁은 노태우의 6.29선언을 계기로 종료되었다. 항쟁을 주도한 주요 세력들과 시민들은 일제히 승리를 선언했다. 6.29선언 직후에 연세대에서 열린 집회는 축제 분위기였다. 마치 다른 세상이 열린 듯했다. 그 사이에서 간간히 소수의 단말마 같은 목소리, “파쇼하의 개헌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등의 구호는 승리를 자축하는 2만여 학생들의 함성 속에 파묻혀 버렸다. 곧 닥쳐올 필연적 분열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6월항쟁 주도세력들의 경향

6월항쟁을 주도한 대표적 상층 세력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국본)이다. 그 당시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과 재야운동권의 대표조직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이 결합한 범민주 공동전선 격이다.

통일민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했다. 김영삼이 총재를 맡았고, 김대중은 미복권 상태라 합법정당에 참여할 수 없는 신분이지만, 당내 양대 정파의 하나인 동교동계 수장으로서 절반의 지분을 행사하고 있었다.

민통련은 그 당시 재야운동권세력의 상층 연합조직 격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낮은 단계의 민중통일전선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조직과 대중조직의 구분조차 모호하던 그 시기에 명확한 위상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의장은 문익환(이하 존칭 생략함), 부의장은 계훈제, 백기완, 이소선 등이 맡았다. 이소선은 상징적 인물로서 정치적 역할은 크지 않았다. 나머지 3인의 의장단은 훗날 대선 국면에서 서로 다른 노선으로 갈라지게 된다.

항쟁국면에서 선도적으로 물적 역량으로 작용한 세력은 역시 학생운동권이다. 1985년 5월에 학생운동의 전국조직으로서 ‘전국학생총연합’(약칭 전학련, 의장 김민석)이 결성됐지만 공안탄압으로 곧 와해되었다. 6월 항쟁 당시에는 전국조직은 없었고 지역조직만 있었다.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서대협)가 항쟁의 선도적 역량을 제공했다.

항쟁 이후 그해 8월에 대전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약칭 전대협) 창립출범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지도부는 연단을 독점하고 소수의 목소리를 배제했다. 이미 운동권 내부에서는 직선제를 쟁취하고 보수야당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일을 항쟁의 성과로 삼는 대중추수주의적 경향이 득세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향을 싸잡아서 하나의 정치노선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 중심에는 흔히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로 통칭되는 전략노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민통련과 서대협은 공히 그러한 경향이 다수였다.


비판적 지지와 민중독자후보의 분화

6.29 이후 복권된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정치일선에 나섰다. 통일민주당에 입당해서 한동안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후보단일화 협상이 끝내 실패하면서 김대중과 그의 일파는 탈당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여 독자출마를 강행하게 된다. NL계가 주도하는 전대협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사실상 무조건 지지)를 선언했다. 문익환을 비롯한 민통련 다수도 동참했다. 비판적 지지라는 지긋지긋한 망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반면에 CA(Constitutional Assembly, 제헌의회)그룹1) 등 학생운동 소수파와 백기완 선생을 비롯한 민통련 소수는 민중독자후보 노선을 선택했다. 계훈제, 박형규 등 일부는 후보단일화 입장에 서게 된다. 대선을 둘러싼 입장이 제각각 갈라진 것이다. 이로써 80년대 암흑기에 민중운동 상층의 구심역할을 했던 민통련은 사실상 와해된다.

민중독자후보 진영은 백기완을 민중후보로 추대하고 선본을 구성했다. 명칭은 ‘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약칭 백본 또는 백선본). 백선본에는 다양한 경향의 사람들이 결합했다. 그중 변혁 지향적 운동의 역사에서 의미를 가질만한 조직으로는 CA그룹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조직적으로 결합한 역량으로는 CA그룹이 다수였다.

CA그룹 기관지 ‘선봉’2)은 당면 대선의 전술적 슬로건으로 ‘민중집권’을 주장했으나, 조직중앙은 ‘민주연립정부’를 주장하는 견해가 다수였다. 조직중앙과 편집중앙의 견해차는 훗날 CA그룹 분리의 단초를 제공한다.


민주연립정부를 둘러싼 백 선본의 혼선

선거를 나흘 앞둔 12월 12일, 대학로 유세에서 백기완 후보는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에게 민주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다. 조직결성의 자유, 선전선동의 자유, 민주연립정부 구성 등에 동의하는 후보에게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한다는 제안이었다. 다분히 김대중을 염두에 둔 제안이었다. 본인의 계급적 한계와는 별개로, 지지하는 대중들의 계급적 구성에 있어서, 민주연립정부 구성 대상으로서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김대중은 제안을 거절하고 무조건 지지를 요구했다. 제안서를 갖고 방문한 백기완 후보를 김대중은 거실도 아닌 주방에서 맞이하며 사실상 문전박대까지 했다. 반면에 김영삼은 제안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덥석 동의했다. 전혀 진정성 없는 행동이지만 동의한 것은 사실이다. 백선본은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제안을 거절한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사실상 무조건 지지가 되는 셈이고, 김영삼을 지지한다는 것도 명분 없는 일이었다. 선본 구성원들 사이에서 논란과 혼선이 거듭됐다. 선거 이틀 전인 14일에는 선본의 결정도 없이 백기완 후보와 김영삼의 공동 기자회견이 준비되기도 했다. 선본 구성원들이 몰려가 기자회견을 무산시켰고, 결국 백기완 후보는 그날 저녁에 아무런 입장표명 없이 후보사퇴를 선언하고 잠적하기에 이르렀다.

백선본은 애초부터 명확한 정치적 목표와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 이질적인 집단의 결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조직적으로 결합한 일부 정치조직들도 일관된 전술적 방침을 갖지 못했다. 백선본이 선거 막판에 연출한 혼선과 그에 결합된 조직의 운명은, 통일된 방침과 중심을 세우지 못한 조직운동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교훈이 될 것이다.  ■

 


  1. CA그룹은 1986년에 구성되어 87년 1월에 조직사건으로 와해되었고, 남아 있던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그해 2월에 조직을 재건했다. 재건된 조직의 정식 명칭은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이다. 와해된 ‘구중앙’과 구분하여 CA‘신중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87년 7월에 ‘남한사회의 성격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임무’(성격과 임무)를 발간하여 NDR(민족민주혁명) 노선을 노동계급의 변혁전략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흔히 PD라고 통칭되는 좌파 여러 정파들과 구분하여 ND로 분류되기도 한다.
  2. 노해동의 정치신문. 87년 9월에 창간되어, 약 20일 간격으로 7호까지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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