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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육아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이야기

매주 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로지 내 아이를 잘 기르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라는 이름의 천차만별 ‘어른이들’이 모였다. 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체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들. 때로는 낯 뜨겁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용기 있고 어리숙한 내 안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는 곳. 지금 어른이들의 등원이 시작된다. 웰컴! 공동육아!

 

 


-총회를 시작합니다

 

공동육아를 하면서 종종 들었던 이야기는 다른 공동육아의 ‘깨진’ 이야기였다. “00 공동육아에서 싸움이 났데요. 멱살 잡고 싸우고 난리도 아녔데요” “에휴, 결국 깨졌다더라고요. 절반은 다 나가고….” 태풍이 몰아치기 전 까지는 이런 얘기들이 그저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다 큰 어른들이 싸우긴 왜 싸워?’ 하고 은근히 남의 싸움을 비웃기도 했다.

 

“도대체 왜 싸운데요?”

 

특히 신입 조합원 교육을 할 때면 이 질문을 종종 듣게 된다. 처음엔 ‘그러게요!’ 하며 같이 웃었지만, 훗날에는 ‘저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우리 일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조합에도 첫 태풍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총회는 우리 집에서 열렸다.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총회에 참석하는 것은 조합 전체의 의무 사항이다. 이 자리에서는 소위별로 활동한 내용과 다음 분기에 대한 계획을 함께 나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안건들이 나오게 되는데 어떤 안건인지에 따라 조합의 ‘법’에 해당하는 ‘정관’을 고치거나 만들어 넣기도 한다. 총회 참석자의 2/3 이상이 결의하게 되면 원래 있던 정관을 바꿀 수 있다. 한 달 전 발의된 이번 안건은 조합원들이 매달 몇 십만 원씩 내는 ‘조합비’에 관련된 것이었다.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조합비를 아이당으로 할 것이냐,

가구당으로 할 것이냐

 

안건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랬다. 지금까지는 터전에 형제나 자매를 동시에 보내는 집이 없었고, 따라서 큰 논란 없이 정관에 명시된 대로 ‘아이당’ 조합비를 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졸업, 이사 등으로 그 해 자리가 많이 비게 되었다. 그 당시 홍보교육 이사로 신입 상담을 맡고 있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다자녀가 들어오게 되면 한 번에 두 자리 이상이 채워지게 되니 여러모로 유리했지만, 조합비 얘기를 듣고는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 일이 자꾸만 생겼던 것이다. 어떤 엄마는 못내 아쉬운 듯 “요즘은 태권도, 피아노 학원도 둘째 보내면 할인해주던데….”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다자녀가 들어올 경우 현재의 정관대로라면 매 달 내야 할 조합비가 두 배가 되고, 가구당일 경우 한 아이만 보내는 집과 동일한 비용을 내게 된다. 다자녀인 가정에게는 다른 어린이집에 비해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비용이 훨씬 높은 벽으로 느껴질 터였다.(일반 어린이집에는 조합비가 없다) 자연스럽게 조합비의 기준에 대한 이야기가 이사회와 소위 모임들을 통해 나오게 되었다. 두 가지 선택의 비용 차이는 두 아이를 보낼 경우 일 년에 약 300만 원 정도가 된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만약 자매나 형제의 수가 셋, 넷으로 늘어난다면? 금액은 600, 900만 원으로 간극이 더 커진다.(이것은 7년 전 조합비 기준이고 현재는 조합비가 여러번 인상되었다)명확하게 보이는 비용의 차이 앞에서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왜 이걸 하려는 거죠?? 이득이 훨씬 적은데!”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조합에 적자가 났을 경우, 적자분을 조합원들이 나눠 부담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이 기준이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가구당으로 분담하면 1/n, 아이당으로 분담하면 형제, 자매가 있는 집은 적자분의 두 배를 내야 한다.

 

“다자녀 가정이 내야 할 분담금이 적어지면 그만큼 우리가 더 내야 하는 거잖아요? 도대체 왜?”

 

방모임에서도, 소위별 모임에서도, 아마들 한 둘만 모여도 모두가 그 얘기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적자와 원아 모집에서도 ‘만약 이렇다면’ 이라는 손익계산이 돌아가다 보면, 우리 개개인에게 닥칠 잠재적 손해가 점점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눈치 안 보고 좀 편히 제 의견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고래가 입을 열었다. 고래는 이미 이전에 다른 공동육아를 연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고래의 삼 남매는 모두 그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세 아이가 다니는 공동육아의 창립멤버였던 고래는 아마도 그곳에 많은 마음을 쏟았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해인가 조합에 큰 적자가 나게 되었다. 애초에 공동육아는 ‘수익창출’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적자를 베이스로 품고 있다고 할 만큼 적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갑작스러운 조합원 이탈이나 모집 미달은 단기간 내에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으면 연말정산의 공포로 이어지게 된다. 적자의 폭은 컸고, 조합원들은 평소에는 열어볼 일이 거의 없는 정관을 뒤적이게 되었다. 하필이면 ‘적자’에 대해 명시된 부분이 애매했다.

 

‘적자분을 조합원들이 1/n씩 나누어 부담한다’

 

여기서 1/n은 아이당 이란 말인가, 가구당 이란 말인가? 아이 하나를 보내는 대부분의 집들에게는 자연스레 ‘아이당’으로 읽혔고, 고래처럼 아이 여럿을 보내는 집에서는 ‘가구당’으로 읽혔다.

 

“어린이집이 그냥 운영되는 게 아니잖아요. 아이를 둘, 셋 보내는 집과 하나 보내는 집이 어떻게 같을 수 있나요?”

“그러잖아도 늘 적자 날까 걱정인데, 비영리 기관도 아니고 그건 좀 무리 아닌가요?”

 

여기저기서 불안을 감지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정이사인 ‘통통’이 입을 열었다.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것은 이미 정부에서 아이당 보육료를 지원받아 결제하고 있어요. 공동육아가 아닌 다른 어린이집들이 그런 것처럼요. 만약 두 아이를 보내고 있다면 각각의 아이에 대한 보육료가 이미 나온다는 말이죠. 셋이라면 세 아이에 대해 그렇겠죠. 조합비는 이름 그대로 조합 운영에 필요한 비용이니까요. 조합의 적자라던가 운영에 대한 부분은 조합원 가구당 분담하는 것이 맞다고 봐요.”

그러나 이미 벌어진 적자 앞에 사람들은 내가 낼 금액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았고, 대다수가 한 아이인 조합원들은 다수결로 ‘아이당’ 적자 분담을 결정지었다. 이 일로 순식간에 조합의 분위기는 적대적이 되었고 얼어붙어 버렸다. 고래는 세 아이분의 적자를 내고 호빵은 두 아이분의 적자를 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받았고 결국 퇴소하게 되었다. 이때 ‘가구당’에 뜻을 함께 했던 교사 구름과 통통, 오름 부부가 함께 퇴소하게 되면서 고래와 새우, 호빵과 완두 부부까지 총 세 집이 새로운 공동육아를 열었다. 그게 지금의 우리 공동육아였다.

 

“아이당으로 조합비를 내는 것이 당장은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다자녀 가정에게 높은 문턱이 될 수 있어요. 다자녀가 들어오게 되면 한 번에 두 아이를 모집하게 되지요. 물론 보육료도 아이 수만큼 들어오게 되고, 조합원인 가정은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조합 생활을 하게 되니 유지에도 안정적이에요.”

 

이제는 큰 아이와 둘째가 졸업하고 막내 아이만 등원을 하고 있는 고래가 말했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얼마 전 받았던 상담전화가 떠올랐다.

 

“그러면 저희는 아이가 둘이니까…. 육십… 만원 정도를… 매 달 내야 하는 건가요?”

 

조심스럽게 비용을 묻던 엄마는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원아모집 포스터를 붙이러 동네 부동산에 들렀을 때 사장님이 하시던 말씀도 떠올랐다.

 

“그런데 거기 어린이집이 비싼가 봐요? 내가 이 동네 이사 오는 집들 중에 애기 있는 집들을 많이 추천해줬는데 다들 비싸다고 하더라고….”

 

이 정도 환경에서 내 아이가 먹고 놀며 자랄 수 있다면 그다지 비싼 비용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마치 내 아이만 값비싼 기관에 보내는 특권이라도 가진 것처럼 느껴져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시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우리 집 총회 자리로 돌아와 보자. 양쪽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서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다들 누가 ‘가구당’을 원하는지, 누가 ‘아이당’을 원하는지 빤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이당’을 지지하는 ‘마롱’이 말했다.

 

“여기 대한민국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잖아요.

공동육아만 다른 나라는 아니잖아요?“

 

이어 ‘오름’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어린이집 이전에 협동조합이지요.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굳이 모여 터전을 만들고, 조합비를 내고 정관도 만들었어요. 힘들게 이런 일들을 하는 건 우리가 조합이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운영의 초점은 아이가 아니라 조합원인 어른들에게 있다고 봐요. 각 소위를 만들고 각자 역할을 맡아 조합 일도 해요. 그렇게 우리가 열심히 울타리를 만드는 거예요. 그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거고요.”

 

‘울타리’

 

그 말이 내 가슴에 날아와 스며들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울타리를 만드는 거였구나.’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명료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로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모였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모였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자라나는 거구나.’ 그건 마치 어떤 껍질 하나가 ‘탁’하고 깨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를 잘 키우려고 아이만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나는 괜찮은 사람인가?’ 돌이켜 보는 것,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속에서 아이는 저절로 자란다! ‘이게… 공동육아구나!’ 그 순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공동육아가 뭐지? 하는 의문이 들 때마다 가장 먼저 울타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공동육아라는 게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마을이 함께 키우자는 게 본래의 뜻인데, 자식이 여럿 있다고 문턱이 높아지는 곳이 된다면 공동육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회의가 진행될수록 처음의 견고했던 ‘아이당’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고민하고 입장을 바꾸어 나갔다. 결국 장장 세 시간이 넘는 회의 끝에 ‘둘째의 경우 조합비의 50%를 할인한다. 적자의 경우도 이와 같이 한다’로 정관이 바뀌는 이변을 낳게 되었다. 당시 다니던 조합원 모두가 한 아이만 등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결과였다. 나에게 닥칠 손익 계산만으로는 나올 수 없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끝내 신념이 달랐던 ‘마롱’은 퇴소를 결정하게 되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에 어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웃으며 손을 건넨 건 마롱이었다.

 

“어쩔 수 없죠. 해볼만큼 해봤으니까 미련은 없어요. 다음에 초대할게 다들 밥 먹으러 꼭 와야 해요.”

 

그런 마롱에게 고마웠다. 확고한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수하며 달려온 것은 마롱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똑같으니까. 신념이 달랐을 뿐 서로에게 감정이 상할 필요는 없으니까. 툴툴 털고 돌아서는 마롱을 보며 마음 깊이 존중하게 되었다. 만약 내게도 ‘다르다’는 이유로 터전에 남을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마롱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롱이 떠난 후 나는 오랫동안 마롱의 말을 곱씹어 보곤 했다. ‘공동육아는 정말 다른 나라일까?’ 우리가 만드는 법과 규칙은 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 말도 안되는 일인 걸까? 그건 상식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은 걸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생각들은 혹시 ‘허상’이거나, ‘소꿉’ 같은 일은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은 내가 함께 하며 직접 일군 나의 ‘작은 사회’이고,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던 나의 진짜 모습을 자꾸만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며,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여기서 나에게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가 뭔데?’ ‘그 일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그렇게 힘들게 얻어진 답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게 왜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고 싸우게 했냐면, 그건 ‘성장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성장은 언제나 아픈 일이니까.

 

‘성장통’이라는 말이 그냥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보이고 만져지며 느껴지는 일이라는 걸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알게 되었다. 첫 아이는 약 한 달을 일찍 세상에 나왔다. 동네 산부인과에서 아이 가슴에 청진기를 대보고는 ‘심장에 잡음이 들린다’고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두려웠다. 큰 병원에서 검사를 하기 위해 아기를 잠재우고 의사 선생님이 이리저리 심장 초음파를 하는 동안 어두운 검사실 안은 아이의 심장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꽤 긴 시간 동안 선생님은 이리저리 아이의 작은 심장을 살피고, 사진을 찍고 다시 소리를 들었다.

 

“심장이 다 아물지 않았어요. 여기 보이시죠?”

 

선생님이 흑백 화면에 한 곳을 짚는 게 보였다. ‘풕풕풕풕’ 작은 심장이 최선을 다해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아주 작은 일 센티 정도의 구멍이 보였다.

 

“심실과 심실 사이에 벽이 있는데 이 부분이 다 아물지가 않아서 심장이 뛸 때 혈액이 여기로 역류하는 겁니다. 일단은 이게 자연적으로 아무는지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며 지켜봐야 합니다.”

 

아이는 마취에 취해 집에 오는 내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가만히 잠든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 박동을 느껴 보았다. 작은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 박동이 일생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뛴다니 놀랍고 기특했다. 또 안쓰럽고 불안했다. 손 끝으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원초적인 느낌 같았다.

 

“나 아까 태어나서 겪었던 것 중에 제일 무서웠어.”

 

앞자리에서 거북이가 말했다. 나는 끊임없이 뛰고 있을 거북이의 작은 심장을 생각했다.

 

“나도 그랬어.”

 

그리고 나의 심장을.

 

*

안킬로는 그 뒤로도 몇 년 동안 정기적으로 심장 초음파를 했고, 갈 때마다 구멍은 밀리미터 단위로 조금씩 조금씩 작아졌다. 심장이 자라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되도록이면 심장의 구멍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잘 먹지 않고 잘 자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여러 밤을 지새웠고, 이유식 맛있게 만드는 법을 검색했다. 아이는 아주 더디고 힘겹게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심장이 닫혔다.

 

“이 정도면 수술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살아가는 데에 큰 문제없을 겁니다.”

 

몇 년 간 참았던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성장은 그런 것이었다. 연약하고 불온하며 아픈 것,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

 

아이들이 한참 자라나는 유아기가 되면 하루 종일 신나게 잘 놀다가도 밤이 되면 다리가 아프다고 징징 울곤 했다. 그러면 오일을 발라 종아리와 발목을 문질러 주거나, 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발을 담그게 하고는 말해준다.

 

“우리 아가가 쑥쑥 자라려나 보다.

얼마나 또 크려고 이렇게 아픈 거야?”

 

하고는 기쁨의 놀란 눈을 하고, 활짝 웃어준다. 아무 걱정 말라고, 넌 잘 크고 있고 그런 네가 너무 대견하다고.

 

어른들도 성장한다. 때로는 싸우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조금씩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나를 더 잘 알게 될수록 내가 내린 결정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된다. 내가 내린 방향과 결정에 대해 소신을 갖고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며 그 어느 때보다 값진 ‘성취’를 느꼈다. 공동육아에서는 원론적이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정치적 싸움도 종종 일어난다. 나는 그런 싸움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며 자기만의 색깔을 갖게 만드는 원천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꺼이 매번 싸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용감히 돌진했다.

 

뭐, 싸우는 게 뭐 어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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