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세상에 나갈 준비” -터전살이, 들살이, 그리고 되살이

 

 

 

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육아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이야기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로지 내 아이를 잘 기르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라는 이름의 천차만별 ‘어른이들’이 모였다. 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체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들. 때로는 낯 뜨겁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용기 있고 어리숙한 내 안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는 곳. 지금 어른이들의 등원이 시작된다. 웰컴! 공동육아!

 

 

 


– 해 보내기 잔치

 

공동육아를 하게 되면 일 년이라는 시간이 공동육아의 크고 작은 행사들을 기점으로 돌아가게 되기도 한다. 연초가 되면 어김없이 총회가 열리고 새로운 이사진이 꾸려진다. 그 다음으로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수료식이 있고, 봄이 되면 한참 신입 조합원들이 들어오는 시기로 신입교육과 소위별 모임, 방모임 등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봄 꽃이 만발하는 오월이 오면 모꼬지 갈 때가 되었구나 하고, 가장 더울 때와 추울 때가 되면 두 번의 대청소를 한다. 아이들은 터전살이를 준비하고, 곧 두 번째 총회가 열리는 시기가 다가온다. 가을이 되면 체육대회와 들살이를 나가고, 드디어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면 배추와 고춧가루를 주문하고 김장을 한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동짓날 우리는 터전에 모인다. 일 년을 마무리하는 해보내기 잔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보통 유치원에서는 일 년을 마무리하며 부모님을 초대해 재롱잔치를 연다. 아이들은 몇 달간 연습한 춤과 노래를 무대 위에 선보인다. 공동육아의 다른 점은 아마들도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 틈틈이 시간을 내 준비한 아마들의 재롱잔치는 눈물겹게 웃기고 어설프다. 첫 공연에서 아빠들은 <아기상어> 노래에 맞춰 율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하나의 율동이라기엔 너무나 제각각인 개성을 뽐냈다. “아~기 상어 뚜르뚭뜨”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에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고, “귀여운~ 뚜르뚭뜨” 차마 민망함에 관객을 바라보지 못하고 허공만 응시하며 춤을 추는 아빠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뚫어져라 ‘내 아빠’만을 바라보며 열렬한 응원을 보낸다.

 

“우리 아빠가 제일 잘 춘다!”

 

엄마들의 공연은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노래로 만든 <사랑한다는 말은>과 동요 <코끼리 아저씨와 고래 아가씨>로 꾸며졌다. 틈틈이 모여 직접 연주하는 피아노와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랫말을 외우고 가사에 맞는 수화도 배웠다. 동요는 짧은 뮤지컬 단막극처럼 역할을 정하고 코끼리, 고래, 문어 같은 출연 동물들의 가면도 만들어 썼다. 솜씨 좋은 둥굴레가 잔치 당일 날 태평양의 푸른 물결과 조개껍데기 예물도 정성스레 만들어 왔다. 나도 당시 만삭인 몸으로 근엄하게 문어 박사를 연기했다. 문어 박사 가면 뒤로 부끄러움을 숨길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아마들이 만드는 무대가 신기하기도 하고 신도 나서 장내는 광란, 아니 열광의 도가니 상태였다. ‘우리 엄마가 문어박사라니!’ 안킬로의 얼굴에 충만한 자부심이 떠오른다. 아마 유치원 재롱 잔치에서 내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어느 해 인가는 ‘도토리’가 무심코 남편의 고충을 토로하는 데에서 뜻밖의 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무당거미가 젊을 때 상쇠였거든요. 가끔씩 스트레스를 받으면 꽹과리가 미친 듯이 치고 싶다는데 시끄러우니 칠 데가 있어야지요.”

 

통통이 이를 놓칠 리 없다.

 

“오, 반갑네요! 저는 사물놀이 패에서 장구를 쳤어요. 우리… 그럼 이번 해보내기 잔치에서 사물놀이 해보면 어떨까요?”

“그런데 다른 악기들은 어쩌죠? 북이랑 징을 칠 수 있는 분들이 있을까요?”

“음….(통통이 주위를 돌아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두루미 일단 들어오고, 햇님이도 같이해요~ 우리가 가르쳐줄게. 도토리는 무당거미한테 배우면 되니 당연히 들어오고!”

 

이렇게 또 얼토당토않게 급조된 사물놀이 패에 들어가게 되었다.

 

“두루미는 징 해. 징은 별로 어렵지 않아. 시작할 때랑 끝날 때 알려주고, 중간에 징~ 징~ 하면 얼추 되거든.”

 

징징하기만 하면 된다더니 막상 네 가지 악기 소리가 한 번에 쏟아져 들리니 어디서 들어가고 빠져야 할지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나는 햇님, 도토리와 함께 손목에 암호 같은 박자를 그려 넣었다. 합주 영상을 셀프로 찍어 돌려보며 어디가 잘 못 되었는지 짚어가며 연습을 했다. 도토리 말대로 사물놀이의 특성상 마음껏 연습할 수 있는 장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멤버 중 유일하게 아파트에 살지 않는 통통의 집에 모여 연습을 했는데 2층 주택에 위층에는 통통이, 아래층에는 파랑 네가 살고 있었다.

 

“사물놀이 맞아요? 그냥 마구잡이로 뚱땅거리는 거 같은데….”

 

하며 올라온 파랑 덕에 이러다 공연을 망칠까 슬슬 걱정이 되었다. 공연 직전까지 틈나는 대로 입으로 손으로 박자를 익혀보는 수밖에…. 덩더쿵 덩더쿵 더러러러러…. 그리고 어느새 나는 흰 옷 위에 빨갛고 파란 무명천을 두르고 허공을 향해 징 채를 휘두르고 있었다. 항상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런 식이 었다.

 

 

하늘 보고 별을 따고 땅을 보고 농사짓고

올해도 태풍이요 내년에도 풍년일세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낮같이 밝은 달아

어둠 속에 불빛이 우리네를 비춰주네

 

 

달달 외운 노랫말까지 목청껏 지르고 독주 비슷한 것도 징징 두드리고 나니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공연 중간중간 무당거미와 통통, 햇님, 도토리와 눈이 마주치는데 그 느낌이 퍽 좋았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보내주는 비밀 수신호 같아서.

 

 

아이들도 공연을 한다. 그런데…. 순전히 지들 마음대로다. 흥에 겨워 막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멀뚱멀뚱 서 있다 다리가 아픈지 자리에 주저앉으시는 분도 있다. 안킬로는…. 무대 뒤편에 걸려있던 커다란 배낭에 양 팔을 끼고 대롱대롱 매달려 노느라 바쁘다. 수줍은 ‘이나’는 공연 내내 울먹울먹 하다가 결국 아빠 품으로 숨어든다. 이래서야 ‘보는’ 수고로움이 더 크겠다.

 

이어서 큰 아이들의 <커다란 순무> 연극에서는 평소 낯가림이 심한 ‘세하’가 묵직한 순무 역할을 맡아 명연기를 펼치고 있다. 공연 내내 깊이 뿌리내린 순무처럼 꼼짝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세하가 친구들이 모두 함께 달려들어 손을 잡고 당기자 스르르 기지개를 켠다. 와-! 다 같이 환호하자 세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물감 번지듯 번진다. 아이들의 공연은 아이들이 끝내고 싶을 때 비로소 끝이 난다. 퇴장하지 않고 친구랑 수다를 떨거나 드러누워 버린 막내들 덕분이다. 뭐… 좀 길어져도 괜찮다. 어차피 일 년 중 가장 긴 밤이니까.

 

 

*

일 년을 돌이켜보는 영상회나 사진전은 반응이 좋아 매 년 고정적으로 자리 잡은 행사다. 터전 천장 가득 아이들과 아마들의 일 년이 담긴 수백 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시되고, 화면에서는 아무리 쥐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손 안의 모래알들처럼 반짝이는 장면들이 하염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나다! 나 나온다~” 아이들은 영상에 자기 얼굴이 나올 때마다 즐거워한다. 일 년이지만 영상 속 아이들은 어느새 한 뼘 씩 자라 있다.

 

 

연말엔 또 시상식이 빠질 수 없다. 아마들이 고생한 선생님들에게 선생님들이 고생한 이사진과 아마들에게 상장을 수여한다. 나는 홍보교육이사를 하던 때에 ‘낚시왕’ 상을 받았는데 신입들을 무리 없이 잘 낚았…. 아니 모집했다고 주는 상이 었다. 상으로 귤 한 박스를 받아 들고 다소곳이 수상소감도 발표했다.

 

“내년에도 잘 낚아보겠습니다.”

 

그 밖에도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챙겨주신 인절미에게 <맛있는 밥상>, 가장 많은 날적이를 쓴 아마에게 <날적이 왕> 등 상은 많을수록 좋았다. 때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도 오시고 선생님들의 자녀, 배우자가 함께 와 자리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젊은 날,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며 네온사인 아래 서성이던 처녀, 총각들은 이제 어린이집에 모여 흥청 망…. 즐겁게 연말을 보낸다. 하나씩 준비해 온 음식들을 펼쳐 놓고, 오락과 여흥을 즐긴다. 찰나의 음악을 듣고 무슨 노래인지 맞추는 게임을 하다가 결국 순서에 없던 춤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애들은 그렇다 치고 아마들은 왜 또 이리 신이 난 건지 애, 어른 할 것 없이 뒤섞여 춤을 추고 있다. 징한 놈의 세상, 한바탕 놀다 가면 그뿐!이라고 영화에서도 말하지 않던가. 내년에 또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지라도(실제로 코로나가 터졌다!) 일단은 노는 게 남는 거다. 우리는 긴 긴 밤 지치지 않고 놀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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