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혜원 1년에 딱 한 번 만든다는, ‘여자한테 좋은’ 늙은호박 죽! >

지난해 텃밭에서 딱 두 개 건진, 신데렐라 동화 속 호박마차를 꼭 닮은, 보기만 해도 흐뭇한 늙은호박. 맛나게 먹어 줄 소중한 사람들 기다리며 다용도실에 고이 모셔둔 이 호박을 가을 지나고 겨울까지 가버리기 전 바로 오늘, 드디어 열었다!

나도 호박죽 참 좋아하는데, 나만 먹자고 귀한 호박 가르기에는 왠지 아까워서, 아쉬워서 함께 먹을 누군가를 기다리며 미루고 또 미루었던 늙은호박죽. 더 놔두면 상할까 봐 볼 때마다 괜스레 마음 졸이면서도 이제나 저제나 노오란 호박죽 한 그릇 달고 맛나게 먹으며 마음 달랠 사람이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나니.

어릴 때 엄마는 그랬다. 늙은호박에 무려 ‘꿀’을 넣고 곤 것을, 그 짜릿하게 달달하고 만난 것을 딸내미들한테 먼저 먹으라고 했다. 여자한테 좋은 거라면서. 달콤한 호박죽도 물론이었고.

이건 어린 나에게 참으로 엄청나고도 신기한 일이었다. 왜냐! 맛있는 건 무조건 ‘아들내미’들 먼저 챙기는 엄마였으니까. 사과 하나를 갈라도 씨 가까운 쪽 시큼한 건 딸들, 씨에서 먼 달콤한 부위(?)는 아들들. 밥을 풀 때도 희고 고슬고슬한 밥은 아들들, 맨 밑에 누룬 밥은 딸들. 그리고 또, 또… 하여튼 뭔가 맛있는 게 있으면,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것이 있으면 딸 ‘넷’은 저 뒤로 하고, 아들 ‘둘’한테 먼저 먹이지 못해 애면글면하던 엄마가 글쎄 이 맛있는 호박 음식만큼은 딸들을 먼저 먹이더라는 말씀!

육남매 가운데 셋째 딸로 살면서 여자라서 억울하고 싫었던 적 그 어린 나이에도 사무치게 많았는데 (그게 ‘먹을 거’랑 이어질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열나 유치한데, 그땐 그게 그렇게 서럽고 한스러웠다. 어린 뼈에도 사무칠 만큼.ㅜㅜ) 늙은호박 앞에서만큼은 왠지 ‘여자라서’ 좋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여자한테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때지만 하여튼 호박 음식 앞에서만큼은 ‘여자라서 좋았다.’

오빠, 남동생보다 먼저 먹을 수 있고,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그렇게나 행복했다. 무엇보다 정말, 정말 맛있었고! (다행인지 아닌지, 오빠도 남동생도 호박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둘 다, 삐쩍 말라가지곤 원체 식탐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다. 그러니 엄마가 더 그렇게 애가 타서 이거저거 먹이려고 그랬겠지.) 이런 기억들 때문인지 텃밭에서 나고 자란 늙은호박을 거둘 때면, ‘여자들’한테 맛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곤 했다. 그 생각대로 혼자든 여럿이든 ‘여자들’을 위해(나 포함) 산골 호박죽을 쑤어 왔다.

이번에도 기다렸다. 다용도실에 고이 모신 늙은호박을 바라볼 때마다, ‘여자 중심’ 손님들이 찾아오기만을.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여자만 오는 건 아니지만, 숫자도 많지 않지만, 어쨌든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오는 날, 바로 내일. 때는 이때야! 이 겨울이 더 가버리기 전에, 추운 겨울에 뜨싯하게 어울리는 호박죽을 쑤자!!

호박을 가르고, 껍질을 벗기고, 얇게 썰어서 부글부글 끓인다. 이때, 싱그러운 호박 속 끓인 물을 붓는다. 그래야 더 맛날 거 같아선. 호박이 폭삭폭삭 익어 가면 나무주걱으로 하나하나 뭉갠다. 양이 적으면야, 한소끔 끓인 뒤에 믹서로 갈 수도 있겠지만 들통 가득한 호박을 그러기는 어렵지.

호박죽이 되기를 기다리며 저녁도 미루고 기다리는 시간. 구수하고 들큰하게 호박 익는 내음이 코를 지나 마음까지 뜨끈하게 적시니, 배가 고파도 참을 수 있다. 호박죽 만드는 데만 서너 시간도 더 드네. 요것도 참 손이 많이 가기는 하구나. 저녁은 호박죽 먹기로 작정한 나와 달리 호박죽은 ‘간식’ 정도로 여기는 옆지기는 꾸역꾸역 혼자 밥을 자신다. 호박 자르고 젓고, 온갖 일 다 하느라 배가 고프기도 했을 테지.

찹쌀 불려 믹서에 간 것까지 붓고 오래오래 저어 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호박죽이 드디어 다 되었다!

오메 맛난 거! 내가 이 맛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고. 손님 핑계를 댔지만 실은, 내가 얼마나, 얼마나 이 호박죽이 먹고 싶었던고!

한 사발, 두 사발, 세 사발…. 끝도 없이 들어가는 호박죽. 이걸 먹으면 붓기가 내린다는데 이러다 없던 붓기도 생기겠다. 여러 그릇 비웠어도 여전히 들통 그득한 호박죽. 내일 찾아올 산골손님들도 맛나게 먹으면 좋겠다. 입맛 가벼운 나한테는 맛났다지만 다른 이들한테도 그럴지는 좀 자신없지만, 혹여 입맛 없다고 손사래 치더라도 먹으라고 꾸역꾸역 퍼줄 거다. ‘여자한테 좋은 거’라고, ‘산골혜원 일 년에 딱 한 번 만드는 거’라고 박박 우기면서.


<“사랑하는 벗님, ‘술’과 평생 동무하기 위하여, 몸에 좋은 술 내 손으로 빚어 먹자!” -막걸리랑 행복한 동거 시~작! ^^>

산골살림 하면서 꼭 하고 싶었음에도 그토록 미루고 미루던 일을 드뎌 해냈다. 바로 내 손으로 술 빚는 일. 귀찮아서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술과 동무하는 우리 부부. 직접 빚어서야 어디 그 양을 감당할 것이며, 그 재료값은 또 어찌 채워갈 것인가. 특히, 쌀로 만드는 막걸리는 사서 먹으면 그 값이 훨씬 싼 것을.

산골살이 제 아무리 좋고 좋아도 몸 여기저기 나이 들어간다고 보내는 신호마저 사라지는 건 아닐지니. 자연스럽게 나이 먹어 가듯, 자연스레 몸도 늙어가니까. 살면서 크게 바라는 건 없는데, 평생 술과 행복하게 동무하며 지낼 수 있을 딱 그만큼의 건강만은 쫌 간절히 바라옵나니. 하여, 한 살 더 먹기 일보직전에 큰 결심 하나 해본다. 사랑하고 애정하는 벗, 술님과 언제까지나 동무할 수 있도록 몸에 좋은 술 직접 빚어 지나치지 않게, 소중하게, 꾸준하게 먹어 보자!

그리하여 막걸리를 담갔다. 드디어, 드디어!


[사진 – 막걸리를 위한 누룩과 효모]

 


[사진 – 고두밥과 미리 불려놓은 누룩+효모 섞기 일보 직전!]

 

 

누룩이랑 효모랑 고두밥에 맑은 지하수 부어 손으로 젓고 또 젓는 시간. 손을 내도록 빼고 싶지 않을 만큼 흐뭇하고 기쁘고 행복하다. 앞으로 계속 빚어 먹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불끈불끈!

술 만드는 길을 보여주고, 또 전수해 준 빨간거북 언니, 사무치게 고마워요! 그동안 언니가 울집에 올 때마다 듬뿍듬뿍 안겨 준 수제막걸리랑 맥주의 그 깊고 짜릿한 맛에 물든 덕분에 막걸리 빚을 욕망도 갖게 되었고, 결심에 이어 드뎌 실천까지 할 수 있었네요. 내 삶에 처음 빚어보는 막걸리 다 언니 덕분입죠! 막걸리 잘되면 술 스승님께 맛난 거 대접할게요. 몸에 좋은 술에 잘 어울릴 몸에 좋은 막걸리 안주랑 같이요~ 이번 막걸리 잘되거들랑담엔 맥주 빚는 법 전수도 잘 부탁드림돠! ^^

그나저나 이제 날마다 막걸리 병쳐다보게 생겼다. 조금씩 술이 익어 가는 모습 바라보기 너무 재밌고 신기할 것만 같아서 벌써부터 두근,두근~~~ 막걸리 동무 다 되면, 잘 익으면 사랑하는 벗님들과 함께 나눌 생각만으로도 행복이 온몸 가득 흐른다. 지금 내 몸 구석구석 흐르고 있는 구수하고 달큰한 빨간거북 언니표 맑고 고운 막걸리처럼.

 


[막걸리와 행복한 동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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