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거둔 늙은호박 하나가 있다. 조금 울퉁불퉁하긴 해도 단단하고 묵직했다. 호박죽 잘 먹을 누군가 오면 그때 먹어야지, 하고는 다용도실에 그저 모셔(?)만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호박 한 귀퉁이가 스멀스멀 썩어 있는 모습을. ‘아이쿠야!’

다른 때 같았으면 썩은 부분 얼른 도려내고 살아남은 곳이라도 어떡하든 먹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한데 그러지 못했다. 버리지 않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게 그렇게 싫고도 구차하게 느껴졌다.

하루, 이틀… 한 달 넘게 흐르는 시간 동안 몸통 구석구석 썩어 가는 호박을 하릴없이 바라만 보았다. 문득 그 모습이 꼭 내 마음 같다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호박을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말을 건넸다.

‘애써 자란 너를 이렇게 놔두는 내가 참 못났구나. 미안하다. 지금은 그냥 좀 못난 채로 살게. 너를 지켜 주지 못한 나를 부디 용서해 주길…ㅠㅜ’

내가 호박을 닮은 건지, 호박이 나를 닮은 건지. 볼 때마다 애틋한 나머지 차마 어디 치우지도 못했던 늙은호박. 바로 어제, 호박 밑으로 누런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순간 마음을 정했다.

‘미련을 거두자, 썩을 만해서 썩었을 거야. 좀 늦었지만 이제라도 땅으로 돌려보내자.’

다용도실에서 호박을 빼고 그 자리를 닦아 내는데 마음이 뭔가 후련하다. 호박이 썩어 가는 걸 보면서도 그냥 둘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박 속을 가르지 않고 퇴비장으로 훌쩍 던졌다, 곪았던 마음도 함께 실어서. 썩은 호박은 썩었기 때문에 땅에 더 좋은 거름이 될 테지. 나를 속 썩이던 이 마음도 내 삶에 소중한 밑거름이 될 수 있으려나.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에잇, 아님 말고! 던져 버린 게 어딘데.^^

참 다행히도! 단호박 하나가 남아 있다. 짙은 녹색 때깔, 단단한 몸통이 아직도 싱싱하다고 대신 말해 주는 듯하다. 그래, 이것만큼은 아무 탈이 없을 거야.

내 안에 썩은 늙은호박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단단한 단호박을 밀어 넣는다. 아, 마음이 단호박처럼 달달하고도 딴딴해진 느낌! 불쑥 생각나는 동요 한 자락. 노랫말 살짝 바꿔서 불러 본다.

“호박 같은 내 얼굴 이쁘기도 하구나~ 눈도 둥글 귀도 둥글 입도 둥글 둥글~~♪”

역시 노래는 기분이 좋구나.^^ 아무래도 겨울비 소리를 반주 삼아 떠나보낸 늙은호박과 내 마음을 위하여, 참 오랜만에 기타를 잡아 봐야겠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는 20년 넘게 불러 온 애창곡이자 부를 때마다 맑은 눈물이 나면서도 이 노래처럼 살고 싶다고 불끈불끈 혼자 다짐하게 만드는,

서영은의 ‘혼자가 아닌 나’~♪


<마늘만이 아는 이야기>

올겨울엔 눈이 많이 온다. 마늘밭을 자꾸 보게 된다. 새하얀 눈 속에 파묻힌 마늘 싹. 궁금하다, 걱정도 된다. 비닐을 씌우지 않고 왕겨만 덮어 주었는데 괜찮을까, 괜찮겠지?

조금씩 눈이 녹는다. 푸르뎅뎅한 마늘 싹들이 흰 눈 사이로 삐죽삐죽 드러난다. 살며시 만져 보노라니 조금 시들하긴 해도 살아 있다는 걸 알겠다. 휴~ 다행이다.

눈 밑에서 추웠을까, 눈이 덮여 따뜻했을까. 마늘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 추워서 힘이 들었을지 따스해서 더 좋았을지 아무 상관이 없었을지 그건 마늘만이 아는(?) 이야기.

마늘 싹들이 한결같이 그 자리에 살아 있고, 또 살아가고 있다는 것. 남이사 뭐라고 하든 날씨가 어떻든 간에. 그것만으로도 나는 좋더라. 눈물나게 고맙더라. 그런 마늘을 닮고만 싶더라.

겨울 해가 며칠을 내리쬐니 왕겨 덮은 마늘밭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눈은 물이 되고, 햇볕은 양분이 되어 마늘한테 힘이 되겠지. 아마 그 눈과 그 햇볕은 내 작은 마음도, 시린 가슴도 덮어 주고 녹여 주고 그러했으리라.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시나브로.

겨울 하늘이 고마워서라도 쪼그라든 이 마음을 조금씩 넓혀 보고만 싶다. 마늘처럼 몸이 자랄 방법은 없으니깐.^^

어머나! 오랜만에 겨울비님이 불쑥 오시네~ 비는 비대로 또 좋구나. 꾸덕꾸덕 쌓인 마음속 먼지들을 촉.촉.이 적시며 맑게 씻어 주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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