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 30분
성북구 돈암동

 

보통 이르기를 높은 곳이 밝고 낮은 곳이 어둡다 합니다. 하지만 돈암동 주택가는 후미지고 어두운 언덕배기 집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바깥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이 오히려 유쾌합니다.

그러나 과외선생으로 출근하는 것은 다른 노동에 비하여 아주 편한 일입니다.

 

 

12시 30분
용산구 한강로3가

 

다섯 발자국 뒷걸음쳐서 올려다봅니다. 다른 누구의 집에 간다는 건 아주 다른 세계에 진입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은 그 세계가 다다를 수도 넘을 수도 없는 견고한 성채(城砦)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높은 아파트였습니다. 주민등록증을 내고 출입증을 받았습니다.

 

16시 30분
은평구 녹번동

 

300에 30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끌려다니네

-씨없는 수박, 김대중 <300/30>중에서

10년 전 인디음악으로 서울을 배웠던 것이 지금 너무 순진한 일이 되었습니다. 지하철역이 먼 아파트지만 300에 30을 몇 번 곱해도 닿을 수 없는 곳이거든요.

 

20시 30분
강동구 암사동

돈암동에 살고 나서부터 “열심히 해서 좋은 데로 옮겨야지.” 하고 푸념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나는 우리 집을 사랑하지만, 이렇게 견고한 성채를 매일 매양 올려다보면 어떤 조바심이 쳐지는 것이죠. 열심히 해서 될 일이면 참 좋겠네요.

 

22시30분
강동구 암사동

 

달무리인줄 알았더니
옥상의 조명이었습니다.

 

2021년 6월 24일 00시 10분
성북구 돈암동

아, 불을 켜놓고 왔군요. 3층짜리 빌라는 성벽이나 요새가 아니지만, 거기 대항하는 귀여운 전진기지라고 생각하렵니다. 어두운 언덕일지언정, 올려다보면 하늘이 아주 잘 보입니다. 그 야릇한 자부심으로 내일 하루를 살아봅니다.

올려다보며 사는 게 재밌거든요.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34호에 앞서 실린 사진과 글을 <이음>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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