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나도원의 음악과 사회’②]

아래에서 노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임정득

 

 

글: 나도원 (노동당 공동대표ㆍ경기도당 공동위원장, 음악평론가)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무대 아래에서

 

테리 길리엄Terry Gilliam 감독이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년》을 바탕으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더하여 만든 영화 <브라질>(1985)과 총기난사사건으로 인생이 뒤바뀐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환상적인 영화 <피셔 킹>(1991)은 나의 20대에 큰 영감을 주었다. 인류문명이 거의 붕괴한 미래와 바이러스 테러 직전의 현재를 오가는 <12 몽키스>(1995)도 인상 깊었다. 이 세 영화에는 모두 광인이거나, 광인으로 오해받거나, 광인이 되어버리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대개는 피해자 혹은 선한 자들이다.

 

2020년부터 한국과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사태’는 사회, 경제, 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치에도 마찬가지여서 코로나19 질병관리체계 장기화는 제21대 국회의원선거 결과에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무엇보다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들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불안정노동자, 영세자영업자의 위기가 대표적이다. 특히 이 두 직종의 성격을 고스란히 지닌 문화예술노동자들 또한 생존 위기에 내몰릴 정도로 결정타를 맞았다.

 

SNS에선 문화예술 종사자들의 탄식과 비판을 접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19 긴급예술지원’의 비현실성을 논하는 글부터 극단적 상황에 내몰린 자괴감, 그리고 현실 타개를 위한 고민과 노력이 ‘타임라인’을 수시로 채웠다. 1895년에 파리에서 영화관이 개관한 이래, 이때처럼 관객이 사라지고 텅 빈 영화관이 있었나 싶은 시절이 계속되다 보니 영화 종사자들의 답답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음악활동을 할 수 없는 음악인들의 허탈감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음악공연이 대부분 취소되었고, 새로운 작품을 발표해도 홍보할 길을 도무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소원해진 공연장의 쓸쓸한 풍경, 관객 없는 공연에 대한 소회를 남겼다.

 

 

관객 없이 노래하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커다란 무대, 홀로 서 있는 모습에 갑자기 마음이 뭉클하네요. 그러고 보니 무대는 언제나 외로웠네요.”

– 음악인 임정득의 페이스북에서 –

 


 

그보다 오래전, 굴뚝 아래에서

 

 

2014년과 2015년을 이어주던 겨울,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쌍둥이처럼 서 있는 굴뚝과 밀양 송전탑 아래 차가운 천막 그리고 구미의 황량한 스타케미칼 굴뚝을 찾았다. 모두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세상은 억울한 사람들을 하늘 가까이 높은 곳으로 밀어 올리고, 약한 사람들을 바닥보다 아래로 잠기게 한다. 극한의 공동경험이 ‘참사’라는 역사적 용어로 기록된 ‘용산’과 ‘세월호’ 그리고 ‘이태원’…, 사건이 아닐지라도 세상살이가 그러하다. 대도시에 사는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가족들의 거처는 점점 높은 곳으로, 그리고 점점 좁은 곳으로 옮겨진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오랜 주민들이 하나둘 다른 동네로 떠나지만, 떠날 데 없는 가족은 다시 아래, 즉 지하로 이사하기 마련이다. 도시의 가난한 생활이란 차츰 높이 오르다가 어느 순간 처음보다 더욱 아래로 내려간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도 얼굴을, 눈을 가릴 수는 있다. 각각 자본과 권력의 방식이다. 실체를 숨기고 사실과 다른 팩트를 전한다. 그러면 분하지만 힘없는 이들은 높고 좁은 크레인으로, 철탑으로, 망루로, 전광판으로, 그리고 공장 굴뚝으로 올라야 했다. 그 아래 낮고 넓은 아스팔트 거리에 모인 이들은 차마 가뭄 속에서도 비를 바라지 못한 채 고개를 쳐들고 응원하고 노래한다. 그런 곳에선 그럴듯한 무대보다는 길거리에서 더 자주 노래해야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흔히 ‘버스킹’이라 부르는 거리음악과는 전혀 다른 또 다른 거리음악이 거기에 있다.

 

그 무렵 겨울, 부당하게 일자리를 잃은 차광호가 3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인 굴뚝 아래에 그가 마이크를 쥐고 섰다. 구미시 외곽에 위치한 스타케미칼 공장 근처로 모여든 사람들은 여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절로 손뼉을 쳤고, 이탈리아 민요를 록 버전으로 만든 <Bella Ciao (벨라 차오)>를 부를 때엔 서로에게 흥을 얻어 몸을 흔들었다. ‘굴뚝 아래 아스팔트 위’에 선 임정득이었다.

 


 * 본문 내 사진 출처 – 임정득 페이스북

 


 

저항하는 존재들의 연대를 위하여,

대중성과 현장성의 조화를 위하여,

록 싱어송라이터 임정득

 

영남대학교 ‘예사가락’ 출신으로 ‘좋은 친구들’에서 노래운동을 한 임정득은 2010년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1년에 발표한 첫 번째 정규앨범 《자유로운 세계》를 통하여 스스로 작사하고 작곡하는 음악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정규앨범 《당신이 살지 않았던 세계》(2015)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사와 작곡 그리고 프로듀싱을 맡아 자기음악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곱 곡을 작곡하면서도 박재홍과 김우직 그리고 이지은 등의 편곡과 여러 연주인들의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앨범의 완성도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노랫말을 쓰면서 권정생과 김남주의 글을 인용하고, 장정일의 글과 신경현의 시를 가져오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만들어낸다. 혼자만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음악이 지닌 특징은 평범한 사람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면서 음악적 발전을 함께 도모하는 것이다. 오페라와 록의 만남을 잘 소화한 <당신이 살지 않았던 세계에 관하여>라든가, 록발라드의 형식을 취한 <멈추지 말아줘>와 <평범한 사람에게>는 서정성과 강렬함을 함께 품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예쁘게 부르는, 정확하게 말하면 힘겨운 상황 속에서 희망을 불러내고자 애쓰는 <평범한 사람에게>가 있으며, 이국의 선율을 담은 <그랬으면 좋겠다>와 고단한 노동자들의 겨울 풍경 너머로 캐럴송을 흐르게 하는 <눈물겹지만 첫눈이다>가 있다. 이 장면들에는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초대하여 풍성하게 조율한 사운드가 동행한다.

 

특별히 귀를 기울이게 되는 곡들도 여럿이다. 한번 들어도 후렴구를 기억할 수 있는 <V (널 향한 그리움)>와 1990년대 록 스타일인 <아스팔트 위 작은 깃발>은 공연장과 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곡들이다. 또한 비참한 세계를 그리며 다른 삶을 가르친 권정생 선생과 함께 부르는 듯한 <가난한 사내>와 <그 이름>은 품과 스케일이 넓어 좋은 곡들이다. 일렉트릭 기타가 적절한 역할을 하는 록의 강렬함과 세심하게 다듬어낸 부드러움을 조화시켰다. 이러한 시도들은 결국 현장성과 서정성의 조화로 귀결된다.

 

 

임정득의 노래들을 따라 가보면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저항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살아서, 싸우면서 존재한다. 다른 하나는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창작자와 동료들의 마음이다. 그들은 저들과 하나가 된다. 저항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지지와 위로의 마음을 품고 있는 이 음악을 다시 세 개의 낱말로 압축하면 ‘존재와 저항 그리고 위로’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너를 넘어선 ‘저항하는 존재들의 연대’가 《당신이 살지 않았던 세계》를 관통하여 흐른다.

 

벽이나 둑의 벽돌 틈을 뚫고 고되게 자라는 풀들을 발견하면 경외심을 품고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어디에든 뿌리를 내리고 어떻게든 줄기를 뻗는다. 요란한 환영 행사는 없을지라도 세상 여기저기 새롭게 돋아나는 음악들을 모두 담기엔 마음-바구니가 부족하다. 우리가 할 일은 생기 어린 반항과 치열한 저항이 만나 희망을 전망으로 바꾸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거기에,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이 있다.

 

 

저항음악을 다시 말하는 이유

존재와 저항 그리고 위로의 음악

 

우리가 사는 곳은 평범한 이를 투사로 만들고, 가난한 이가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사회, 그러니까 죽음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노동문화와 진보예술의 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창작집단에선 젊은 피의 수혈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대형 노동조합들마저 자체 노동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문화행사 하나 스스로 기획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행사기획사에 의뢰하여 ‘액수’에 따라 노래패와 가수를 섭외하는 실정이다. 예술노동과 작품의 가치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문화운동을 여전히 도구화하는 수준 언저리에 낙후되어 있다. 새로운 문화자극도 미미하다. 그러나 예술과 인간 그리고 작품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창작과 연대로 항상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민중음악의 퇴조기라고 서슴없이 말하던 때마저 지난 지금, 이제 말하고자 하는 음악들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주된 이유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일치한다. 세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전선도 이동했다. 민주와 반민주 구도에서 이어진 개혁과 수구 구도, 그리고 진보와 보수 구도가 혼합되거나 혼동되는 양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음악의 역할 축소는 역량 약화로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마치 공연이 끝난 뒤의 쓸쓸함을 느끼듯 주로 후일담을 읊조리는 퇴행성까지 내보였다.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누구와도 적이 되고 싶지 않은 자는 모두의 적이 된다. 어떤 세계에 발을 디밀고 나면 대개는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에 민중가요라고 칭하던 노래들이 옛적에 비하여 유순해진 건 고개 숙임이 아니라 눈빛을 벼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음반 대부분이 개인들의 후원을 통하여 제작된다. 대안적인 제작 방식이기도 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민중가요라는 말을 박물관에서조차 둘러보지 않는 유물이나 도서관에서 굳이 찾는 이 없는 고서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관찰하는 현상이 아닌 비평적 관점에서 주목하는 경향은 집단에서 개인으로, 역사에서 생활로의 이동이다. 일상성의 발견도 중시된다. 영화 <트루먼쇼>에서 평생을 갇혀 지낸 트루먼이 이상함을 발견하는 설정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 속에 은폐된 것을 어떻게 폭로하는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민주화 이후의 흐릿한 희망을 발견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비극성과 엄숙주의를 낙천성과 일상성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리에서 함께 부를만한 노래가 없다는 아쉬움의 이면에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희망도 있다.

 

과거에 북한의 ‘탁아소’를 곡해하여 선입견을 심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뒤늦게 ‘탁아소’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 다시 정의해야 한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과 싸우는 노래는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민중음악이라 하건, 저항음악이라 부르건, 현장음악이라 칭하건 당사자들이, 그리고 수용자들이 다시 듣고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뿌리가 다르고 깊이가 다르더라도 그 폭을 넓혀야 한다. 상대는 벌써 모습을 바꾸었으며, 비록 많지는 않을지라도 거리의 음악은 진즉에 나름의 화법을 체득했다. 다른 곳에서 시작하여 비판의식을 담아낸 대중음악도 많아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한 증거들도 제시하려 한다.

 


 

공포사회의 전환

 

우리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공산화 공포로 보수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전쟁 공포로 징병제, 막대한 군사비,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재난 공포로 자본주의 문제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대안을 제출하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 서민은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죽어 나갈 수 있는 공포사회에 살고 있다. 이 공포를 분노로, 행동으로, 행동하는 분노로 바꿔내야 내가 살 수 있다.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여 같이 생존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요구하고 마련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과로사회와 배제사회 속에서 자가 생존이 가능할 수 있을까? 기둥뿌리부터 흔들리는 집은 여기저기 ‘보수’한다고 바로 설 수 없다. 우리사회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래서, 방학숙제를 마치지 못한 채 개학 전날 밤을 맞아버린 초등학생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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