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반대를 위한 반대도 괜찮다

 

 

글: 건수(노동당 경기도당 집행위원)

 

 

정치권 사이에서 여야갈등이 극단적으로 치달으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안 된다”. 정치권이 정책이나 사안을 두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정치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지, 세력의 이해관계를 두고 명분 없는 반대만 일삼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반대를 위한 반대가 꼭 나쁘기만 한 걸까.

 

 

윤석열 정부가 탄소중립기본계획을 발표했다. 법률이 명시한 기본적인 절차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지난 정부의 계획을 수정해 탄소배출감축목표를 축소하겠다는 게 ‘탄소중립기본계획’의 발표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윤석열 정부가 감축하고자 하는 건 탄소배출량이 아니라, 탄소배출감축 목표였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가덕도‧흑산도‧제주 서귀포에 공항을 신설하고, 삼척에는 석탄화력발전소를 신설하고, 기존 원자력발전소를 수명 연장하는 것도 모자라 더 확대하겠다고 한다. 기후위기 시대 저탄소 에너지 발전 확대라는 명분으로 수소발전과 원자력발전소를 확대하고, 재생에너지 산업은 속도가 더디니 속도를 조절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정부의 의지다. 가덕도공항 신설에만 30조 원이 투여되는데, 국가재정난으로 재생에너지 확대가 어렵다는 건 어불성설 아닌가.

 

 

이럴 때 변혁운동진영은 무엇을 해야 할까. 반대하지 않으면,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지만, 속내에는 언제까지 ‘반대투쟁’만 할 것이냐는 고민도 든다. 이는 실제로 기후정의운동 진영에서 많은 발언권을 얻고 있는 주장이다. 특히 요금인상 철회 요구를 둘러싼 논쟁에서, 요금인상 철회라는 반대가 아닌, 그린리모델링이나 에너지 공공성과 같은 대안을 부각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특히 많았다. 오랜 ‘반대투쟁’에 대한 피로도와 회의감은 발언의 설득력을 더 높였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국가는 자본의 집행기구이고, 자본과 노동 간의 화해불가능한 계급대립을 어정쩡하게 섞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기본 속성 아닌가. 그렇기에 노동자의 정치란 ‘반대를 위한 반대’일 수도 있다. 계급적 이해관계가 화해불가능한데, 대화를 통한 협치와 정치적 합의가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러니 반대를 위한 반대는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정치세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일 수도 있겠다.

 

 

414기후정의파업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4월 14일 위력적인 파업이 벌어질까? 당일 거센 직접행동으로 세종정부청사의 하루를 멈출 수 있을까? 그렇게 윤석열 정부의 기후역주행 드라이브를 멈출 수 있을까? 그것이 실패하면, 414기후정의파업은 실패하는 것일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414기후정의파업이 여전히 추상적인 ‘기후정의’를 보다 구체화 한다는 조직위원회의 설명에 약간은 고민이 있다. 지금은 구체적 요구와 이를 통한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민중의 분노를 조직하고 제대로 반대하는 운동 역시 중요하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분노와 반대를 잘 조직하는 게 더 필요하다. 꼭 기후정의가 구체화 되지 않아도, 각자가 윤석열정부의 기후역주행에 분노할 맥락이 구체적이라면 그것도 괜찮다.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 운동도 이런 고민에 놓여 있다.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 않고 정부정책에 반대만 해서 뭐가 남을까? 그러나 난 사회주의 운동이 꼭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 후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현실에 분노를 조직하는 것에 있다. 414기후정의파업에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첫번째 일은 분노하는 일이다. 분노에 대한 감각, 반대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다시 세우는 일, 그게 414기후정의파업에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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