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에서 민주노조운동이 부활한 이래로 총파업 선언은 숱하게 있었다. 그러나 실로 총파업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사건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걸친 노동법 총파업이 유일하다. 그해 겨울을 뜨겁게 달군 총파업 투쟁은 노동법 개정안 재의1)를 얻어내는 것으로 끝났다. 거대한 투쟁에 비하면 허무한 결과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노동계급의 위력을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일어나라 코리아

노동법 총파업을 계기로 97년 대선을 앞둔 민중후보운동이 다시 점화되었다. 과거와 같이 운동권 단체와 학생운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었다. 총파업 투쟁으로 위력을 과시한 민주노총이 새로운 물적 기반이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97년 대선은 민중후보운동이 사라지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름도 달라졌다. ‘민중후보’가 아니라 ‘국민후보’가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름은 내용을 규정한다.

전국연합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좌우를 막론한 운동세력이 모여 ‘국민승리21’을 만들었다. 사실상 활동이 중단된 진정련도 국민승리21에 슬그머니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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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총파업으로 인지도를 높인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이른바 ‘IMF 사태’로 표현되는 경제파탄 국면에 편승하여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애국주의적 슬로건이 진보진영의 몫이 될 수는 없었다. 경제파탄에 직면하여 자칭 ‘준비된 대통령’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권영길 후보는 1.2% 득표에 머물렀다. 과거 민중후보운동과 양적으로 비교해도 두드러진 성과가 아니었다.

97년 대선의 국민후보운동은 숫자로 나타나는 득표뿐만 아니라 과정에서도 한계를 드러냈다. 지난 두 차례 대선에서 보수야당을 지지했던 NL(그 당시 전국연합)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후보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대선이 임박하여 김대중 당선 가능성이 커지면서 전국연합은 국민후보 선거운동을 사실상 방기했다.

좌파진영에서도 균열이 있었다. 애초부터 ‘국민후보’운동에 동의할 수 없었던 ‘한국노동청년연대’는 ‘국민후보전면비판’2) 이라는 문서를 내고 논의에서 철수했다. 이들의 우려는 선거 과정에서 현실화했다. 이른바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으로 노동조합운동의 강경파들이 이탈했다.


재앙

97년 말에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가져왔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축복으로 알았겠지만 실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새로 집권한 김대중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한다는 목적으로 IMF 처방에 따른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19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노동유연화 등을 핵심으로 하는 노사정 대타협이 타결되었다. 민주노총은 합의, 부결, 총파업 선언, 총파업 철회 등의 혼란스러운 대응3) 속에서 위기를 맞았다. 곳곳에서 정리해고, 민영화, 해외매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투쟁이 패배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비정규직 양산과 고용불안이 본격화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공세가 압도적 지배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국 노동운동은 독재정권의 억압에서 벗어나면서 개량의 축적을 맛보기도 전에 신자유주의로 직행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이했다.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라고 부르는 오래된 재앙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그럼에도 60만 조합원4)으로 이뤄진 민주노총의 물리적 역량은 진보정당 건설의 기반이 되었다. 이는 곧 선거를 통해 입증되었다. 98년 지방선거에서 울산 동구청장과 북구청장을 당선시킨 것이다. 민주노총의 양대 거대 사업장이 있는 곳이다. 현대중공업이 있는 동구에서는 울산연합의 김창현이 출마했고, 현대자동차가 있는 북구에서는 진정추 출신 조승수가 출마했다. NL과 범좌파 계열이 각각 양분한 것이다. 진보진영 최초의 자치단체장 당선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하는 진보정당운동이 성공할 가능성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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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에서 진보정당을 창당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이룬다는 정치방침을 결정했다. 마침내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창당했다. 80년대 이래로 출몰했던 진보정당운동과는 다르게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 기반을 갖춘 정당이었다. 신자유주의 공세 속에서 노동운동의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 탄생한 것이다. ■


  1. 김영삼 대통령이 노동법 개정 공포를 보류하고 국회에 재의를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재의 과정에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2. ‘민중후보 운동을 넘어 청년정당으로’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에 따라 이듬해 ‘청년진보당’을 창당한다.
  3. 98년 2월 노사정 대타협 ->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 폭력사태 끝에 대타협 부결 -> 민주노총 집행부 총사퇴 -> 총파업 결의 -> 총파업 철회
  4. 그 당시에는 대략 60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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