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현대사 – 잃어버린 30(6)

<약진과 내리막길>

 

종북파의 대거 입당에 의해 당내 패권 다툼이 본격화하는 와중에도 민주노동당은 일정 기간 성장할 수 있었다. 과거의 진보정당운동과 다르게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중도우파 집권에 따라 대중의 사표 방지 심리가 완화되었다는 점도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후보운동에 반대한 한국노동청년연대가 주축이 되어 청년진보당을 창당했다. 복수의 진보정당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회당 성장과 합당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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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청년진보당 창당대회

청년진보당은 민주노동당보다 앞서서 1998년 11월에 창당했다. 당명에 청년을 덧붙인 것은 창당발기인들의 연령과도 관련되겠지만 완결된 창당이 아니라 앞으로의 진보좌파통합당을 위한 준비라는 뜻을 강조한 것이다.

청년진보당은 2000년 4월 총선에서 파격적으로 서울 전 지역구 출마를 감행하여 평균 3.07%의 득표율을 보였다.

2001년 8월 제3차 당대회를 통해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당의 정신을 표현하는 양대 기치로서 ‘반자본주의’와 ‘반조선로동당’을 채택했다. 당명을 개정했음에도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지는 않았는데, 무엇보다도 강령은 양대 기치에 동의하는 광범위한 세력과 함께 제정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1년 10월 구로(을) 재선거에서 사회당 김향미 후보가 민주노동당 정종권 후보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사회당으로서는 고무적인 성과였고 민주노동당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대두했고 2001년 12월 민주노동당이 합당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2002년 상반기에 이루어진 합당 논의는 그해 6월 지방선거 직전에 결렬되었다. 9월테제에 따라 종북파1)가 민주노동당에 대거 입당하는 상황에서 ‘반조선로동당’ 문제에서 양당이 접점을 찾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 시점까지는 양당이 동등한 지분으로 합당할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이후 상황은 바뀌게 된다.


역사상 최초의 원내진출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크게 약진했다. 울산에서 2명의 구청장을 당선시켰다. 울산 북구청장 선거에서는 2년 전 총선후보 경선에서 의외의 패배를 당한 이상범 전 현대차노조위원장이,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서는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각각 당선되었다. 또한 정당투표에서 전국 평균 8.13%를 득표하여 대다수 시도에서 비례대표 광역의원 1명씩을 당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회당은 정당투표 1.6% 득표에 머물러 양당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민주노동당은 12월 대선에서 권영길 대표를 후보로 내세웠다. 5년 전과는 위상이 달랐다. 지방선거 약진의 결과로서 TV토론 참여가 가능했다. 양대 보수정당 후보들과 나란히 토론에 참여하여 선전한 끝에 3.9% 득표를 기록했다. 이회창 노무현 양대 후보가 막판까지 박빙의 접전을 벌인 상황을 감안하면 뛰어난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2002년 지방선거와 대선에서의 선전으로 2004년 총선에서 원내진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해 비례대표 정당투표제가 도입됨으로써 의석 획득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후보를 당원 직접선거로 선출했다. 지역구보다는 비례대표가 당선 가능성이 높았기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당선을 기대할 수 있는 상위순번에 여성명부 심상정 금속노조 전 사무처장과 일반명부 단병호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1번과 2번으로 선출되었다. 85년 구로동맹파업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각각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그 이하 순번까지도 당선되리라 예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2004년 총선은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파동에 따른 역풍으로 집권 열린우리당이 압승하여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민주노동당도 예상 밖으로 선전했다. 지역구 2명, 비례대표 8명이 당선됨으로써 10석을 획득했다. 역사상 최초의 진보정당 원내진출을 이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수양당에 이어 제3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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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17대 국회 민주노동당 의원단


종북파 3년의 계획 실현

역사상 최초의 원내진출이라는 찬란한 햇빛의 앞뒤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총선 직전인 2004년 1월에 민주노총 4기 집행부 선거가 있었다. 위원장 선거에서 국민파2) 성향의 이수호 후보와 범좌파 성향의 유덕상 후보가 대결했다. 중앙파에서도 위원장 후보를 내려했으나 범좌파 후보단일화를 위해 양보했다.3) 그렇게 해서 국민파와 범좌파의 양자대결이 되었으나 선거 결과 이수호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로써 국민파가 민주노총을 장악했다. 전편에서 소개한 종북파의 3년의 계획이 절반은 실현된 것이다. 노동운동의 위기에 따른 타협주의 경향의 결과인 동시에 이를 심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총선 직후인 2004년 6월에 민주노동당 당직선거가 있었다. 당 대표는 NL과 범좌파 일부가 합의 추대한 김혜경 후보가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러나 사무총장4)에 울산연합 김창현 후보가 당선된 것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중앙 지도부를 NL이 석권했다. 9월테제 이래로 종북파가 대거 입당하여 지역조직부터 꾸준히 장악한 결과였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잇달아 장악함으로써 종북파의 3년의 계획이 실현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역사상 최초의 원내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직후에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범좌파 결집 움직임

민주노동당 범좌파의 결집 움직임은 2004년 총선 직전부터 있었다. 그 시기에는 주로 비례대표 후보 선출에 공동 대응하는 것이 당면한 과제였다. 그 당시 비례대표 후보 선출은 명부별(여성명부, 일반명부) 각2표씩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범좌파 활동가들이 모여 여성명부 심상정, 일반명부 단병호 지지를 각각 결정했다. 노회찬 지지를 추가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반대 의견이 있어서 합의하지 못했다. 반대 이유 중에는 노회찬의 사회주의 신념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취지도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점까지 주도적 좌파 활동가들의 신념은 선명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합의되지 않아서 나머지 명부별 1표씩은 특정 후보 지지방침을 정하지 않고 자유투표에 맡기기로 했다.

위에서 얘기한대로 비례대표 후보 선출 결과 여성명부 심상정, 일반명부 단병호 후보가 1,2위를 차지했다. 범좌파가 원하는 결과를 얻은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을 찾을 수 있다. 그들 두 후보가 노동운동에서 상징성과 인지도를 가진 인물이라는 점, 명부별 2표씩 투표하는 방식이라서 다수파의 세팅 투표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범좌파는 크게 착각하여, 6월 당직선거를 앞두고 1인7표5) 방식에 합의했다. NL의 조직력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결국 당직선거에서 참패하고서 비로소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


  1. 오늘날 극우세력이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흔히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데, 종북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것은 극우세력이 아니다. 그 당시 사회당 원용수 대표가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와의 회담에서 종북주의 해소를 합당의 유일한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처음 쓴 것이다. 당시 극우세력은 ‘친북’이라는 낙인을 주로 사용했는데, 이는 한반도 평화를 거부하고 대북 적대를 조장하는 것이기에 구분하기 위해서 ‘종북’이라는 용어를 쓴 것이다. 즉 ‘종북’이란 북한의 지배세력을 추종하는 집단을 뜻한다. 이 글에서도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가 올바르더라도 극우세력의 오남용에 의해 인상이 변질된 것은 사실이다. 이후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종북파’ 또는 ‘NL’ 등으로 혼용해서 쓰기로 한다.
  2. 그 당시 노동운동의 정파 구도를 크게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3개로 분류했다. 이는 특정 정파의 명칭이 아니라 경향적 분류라고 볼 수 있다. 각각의 이름도 자칭이 아니라 타칭에서 시작되었으며 조롱하는 의미도 포함된다. 국민파는 ‘국민과 함께하는 노동운동’을 주장한다는 뜻, 중앙파는 전노협 이래로 민주노조운동 초기에 중앙 지도부를 장악한 그룹이라는 의미와 함께, 좌우파의 중간 성향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현장파는 현장 중심의 노동운동을 뜻하지만 실제 현장 기반과는 별개의 문제다. 한때는 중앙파와 현장파를 묶어 범좌파로 분류했다. 지금은 이러한 3분법이 무의미하다.
  3. 중앙파의 좌장 격인 단병호 위원장이 범좌파 단일후보를 위해 중앙파 출마를 만류했다고 전해진다. 본인에게 확인한 바는 없다.
  4. 그 당시에는 사무총장을 별도 직선으로 뽑았다. 선출직 총장으로서 다수파 기반을 갖추었기에 대표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5.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최고위원 4인 도합 7인을 선출하는데 1인7표를 행사했기 때문에 풀 세팅 투표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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