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8개월 만에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정말 오랜 세월이 흘렀다. 출장으로 여러 차례 제주도를 오갔지만 한라산은 그저 비행기에서나 제주시내에서 바라만 보는 산이었다. 시간이 나지도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한라산을 오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난 2년여 동안 거의 주말 마다 육지 여기저기 산을 다녔고, 작년 하반기 설악산과 지리산을 다녀오면서 한라산 등반을 계획했다. 그러던 차에 전 날 제주도에서 볼일을 마치고 다음날 한라산에 올랐다.

30년 전에는 어리목에서 올랐는데 현재는 성판악과 관음사 두 곳에서만 오를 수 있고 날짜와 시간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다. 성판악에서 오전 5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출발하는 시간대에 예약해 두었다. 새벽 6시 40분 제주시청 앞에서 버스를 타고 7시 10분쯤 성판악탐방로 입구에 내려 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한 뒤 등산을 시작한다.

한라산은 남한에서 제일 높은 해발 1950m이지만 해발 750m 높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1200m를 오르는 셈이다. 등산로에 들어서자마자 육지와는 전혀 다른 경관이 펼쳐진다. 상록수로 소나무, 삼나무, 전나무, 굴거리나무(가로수로 많이 심음)가 보이고, 활엽수로는 서어나무, 섬노린재나무 등이 있다. 여러 활엽수는 푸른 이끼가 끼어 육지에 있는 물푸레나무처럼 보였지만 잘 알 수가 없다.

키 큰 나무들 아래로 꽝꽝나무와 조릿대(산죽), 진달래나무도 보인다. 특히 조릿대가 한라산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현무암에 100m 오를 때마다 고도가 표시되어 있다. 전날 내린 비로 잔설이 녹아 맑은 물이 흐른다, 바람은 시원하고 새들이 지저귄다. 화산 폭발로 이뤄진 산이라 등산로가 울퉁불퉁한 현무암으로 깔려 있는데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난다.

출발지 안내판에는 성판악에서 백록담까지 ‘9.6km, 4시간 30분’라고 표시되어 있다. 입구에서 출발할 때 안내원이 나이든 등산객들에게 무리하면 위험하다며 잔뜩 겁을 준다. 등산로 곳곳에 ‘진달래밭 12시 30분 까지 도착’, ‘2시 30분 정상 하산’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진달래밭에서 12시 30분 넘으면 정상 가는 것을 통제하고, 정상에서는 오후 2시 30분이면 무조건 하산해야 한다, 조난이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정한 기준인 것 같다.

4km쯤 걸어가니 속밭이 나오고 조금 지나니 속밭 대피소다. 예전엔 이 곳에서 사람들이 말도 키우며 살던 곳인데 지금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거기서 1.7km 더 올라가니 해발 1300m 지점 왼쪽에 사라오름 입구 표시가 나온다, 왕복 1.2km다. 정상까지 가는 시간을 감안해 망설였다. 그런데 올라가보니 환상적이다. 사라오름 직전에 있는 산정호수도 멋있지만 거기서 바라보는 한라산 정상이 일품이다,

다시 출발해 1.5km를 더 올라가니 진달래밭 대피소다. 오전 11시 정도여서 충분한 시간에 올라온 셈이다. 1500m 고지대라 아직 진달래는 피지 않았다. 잠시 차 한잔 마시고 다시 오른다. 1700m 고지에 오르자 고사목이 늘려 있다. 그 정도 높이에서도 맑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한라산 정상부근이 보이기 시작한다. 등산객들의 발걸음은 무거운데 얼굴은 환하다. 정상근처는 현무암 위로 눈향(누운향나무)과 사초류가 보인다. 바람이 세 진다.

출발한 지 5시간 만에 흰사슴이 떼를 지어 놀면서 물을 마셨다는 전설에 따라 부르게 되었다는 백록담(白鹿潭)에 당도한다. 백록담은 둘레가 2km, 깊이 100여m의 분화구다.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등산객들이 줄 지어 서 있다. 이 곳은 한라산동능이고 정상은 백록담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인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장관이다. 30년 넘어 다시 오른 한라산이라 등산로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백록담만은 그 때 그 모습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랜 투쟁 끝에 원직복직하게 된 대우조선해양청원경찰노동자들에게 ‘축하’의 메시지, 삼성생명 빌딩 안에서 439일째 농성 중인 암환자들에 대한 지지와 약관대로 암입원보험금 지급 요구, 미국 스라마일 핵발전소 사고 42주년을 맞아 핵무기와 핵발전 폐기 요구, 해고자 복직요구(기아차 판매 노동자 박미희 2859일,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2450일,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노동자 2100일, LG청소노동자 103일)요구까지 준비해간 인증샷을 찍는다. 손이 얼 정도로 얼얼해 진다.

준비해간 김밥,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다. 물이 식어 미지근하다. 1시간 정도 지체했는데 추워서 더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관음사 방향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조금 내려오니 고사목 지대다 성판악에서 올라오던 곳에서 보던 고사목보다 더 넓은 면적이다. 기후위기 때문인지, 천이과정인지는 알 수 없다. 수많은 계단을 따라 하산한다. 관음사쪽에서 오르는 코스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럴 것 같았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좌우로 보이는 능선과 계곡이 너무 멋있고 아름답다, 한라산 정상도 새롭게 보인다. 멀리서 보던 한라산 정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700m 고지 쯤에 묘소가 있다. 사유지인가? 잔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전날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아이젠을 사용했어야 했다. 출렁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삼각봉(1500m) 대피소가 나온다. 2시간여 동안 2.7km를 걸었다.

다시 출발해 개미등까지 1.1km, 탐라계곡까지 1.7km 끝도 없이 내려간다. 성판악코스에 비해 등산객도 드물다, 탐라계곡에서부터 관음사지구 야영장까지 3.2km는 몸도 지치고 길고 지루한 등산길이다. 그나마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서 숯가마터, 석빙고로 사용했다는 구린굴, 진홍색 진달래, 다른 나무들과 경쟁하며 높이 자란 목련과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며 잠시 피로를 잊는다.

드디어 하산지점인 관음사 입구에 당도한다. 오후 6시 30분이다. 아침 7시 30분 출발해 19.5km 거리에 11시간이 소요됐다. 점심시간을 포함해 중간 중간 쉬는 시간 약 두 시간을 빼면 9시간 정도 걸은 셈이다. 제주시내에서 한라산을 볼 때는 하나의 큰 봉우리였는데 관음사 입구 주자창에서 바라보니 산맥처럼 다가온다. 화산폭발로 바다에서 우뚝 솟아올라 300여개 오름을 거느린 한라산을 이루어 사람들에게 삶터를 내준 의연한 모습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민중의 아픔을 간직한 섬 제주 한라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느낀 하루다.

(산행 396회, 한라산, 2021.3.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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