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이어 북한산 동쪽 등산로 택했다. 우이전철역에 내려 조금 오르다 우이분소를 만난다. 옆으로 소귀천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졸졸 흐른다.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발을 담그고 쉬고 있다. 소귀(牛耳: 우이)마을이다.

평소에는 우이동(골짜기)이라고 알고 지냈지 ‘소의 귀’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도봉산에 있는 봉우리가 소의 귀를 닮아 ‘우이암’이라 불렀는데 동네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우이동 면적의 81%는 북한산이 차지한다. 산동네라 할 수 있다.

상가골목을 지나면 계곡을 만난다. 삼각산 신령에게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례인 도당제(서울시 무형문화제 제42호)를 지낸다는 안내판이 있다. 계속가면 도선사, 백운대 방향인데 왼쪽 대동문 쪽으로 오른다. 초입부터 제법 가파르다. 진달래능선길이다.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산모기 등 벌레가 많다. 조금씩 오를수록 오른쪽으로 소귀천 계곡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의 세 봉우리가 조화를 이룬 삼각산이 정좌를 하고 있다. 더 오른쪽으로 오봉을 필두로 도봉산 능선이 펼쳐진다. 위치에 따라 새로운 모습을 연출한다.

전날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탓에 온 몸이 노곤하다. 발걸음이 무겁다. 쉬는 횟수도 늘어난다. 집에서 늦게 출발하고 전철로 서울시내로 들어갔다가 다시 우이동 입구로 오는 바람에 정오가 넘어 등산을 시작했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오후 늦은 시간에 대동문에 도착한다. 남쪽 대남문에서 시각해 북한산성으로 따라 북쪽으로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동장대, 용암문, 만경대, 위문, 백운대로 이어진다. 몇 차례 다녔지만 그 순서가 헷갈린다. 그 때마다 내 고향 읍내 동 이름인 ‘남성동’을 따라 순서를 떠올려 본다. 시공 읍성과 북한산성의 지형이나 규모는 비교할 수 없다.

대동문도 수리중인 것 같고, 주변 쉼터는 코로나 방역을 빌미로 노란색 테이프가 둘러쳐져 있다. 실내 좁은 식당에서는 4명이 마주보고 식사할 수 있는 데 높은 산 위에서는 쉴 공간도 없이 만들어 놨다. K방역인지 행정편의주의인지 알 수 없다.

물봉선 꽃 사진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하산을 시작했다. 구기동, 진관사, 북한산성 등 여러 방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시간도 늦었고 동쪽코스도 경험할 겸 최단거리인 구천계곡 수유리 아카데미 탐방지원센처 방향을 선택했다. 거리가 짧은 만큼 가팔랐다. 그러나 수락산, 불암산을 필두로 새로운 경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 참 내려오는데 가파른 계곡에 흰색 화강암 바위들이 크게 쪼개지고 널브러져 있다. ‘사릉 석물 채석장 터’라는 표시가 보인다. 설명은 조선시대 왕릉 채석장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사릉(단종 비 정순황후 송씨 묘)의 석물을 채취한 곳이라 한다. 물론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할 당시에는 버려지다시피 했지만 숙종 42년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비의 능으로 조성될 때 이 계곡의 돌을 채석했다 한다. 당시 기술로 이 엄청난 화강암을 어떻게 떼 냈을까 경이롭다.

얼마나 많은 재정과 장정들이 투입됐을까? 민중은 수탈당하하고 있었던 때에. 한 참 내려오다 보니 왕실의 채석장이므로 백성들은 채석을 금지한다는 ‘부석금표(浮石禁標)’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자연물에 대한 특정한 세력의 사적 소유와 특권의 흔적이다. 지금이나 그 때나 지배체제의 형식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다르지 않다. 산에서 자연을 만끽해야 하는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탐욕을 생각해야 하니 어쩌나.

하산하니 국립통일교육원이 보인다. 2000년 초 방북할 때 통일교육 받은 곳이고, 노조 현역 시절 통일연구원에 교섭 관련해서 온 적이 있었는데 매우 오랜만이다. 마을버스를 타고 4.19민주묘지를 지나 수유리 계곡을 빠져나오는데 이 곳 음식점들은 성업 중인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어떨지 몰라도. 8.15광복 76주년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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