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이음>의 장기연재물 <돌아·가다>가 돌아왔습니다. 필자가 2009년 초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써온 이 글의 주된 배경은 2007년 무렵부터라고 합니다. 이 글은 <돌아·가다>의 도입부이고, 일부는 지면으로 출간되었으며, 해당 출판사인 북노마드박종철출판사의 양해를 구합니다. [편집자 주]

<돌아 · 가다> 전편 http://2-um.kr/archives/category/column/doragada

 

저수지의 밤

 

/사진 나도원

 

 

항상 남북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라는 물건이나 꺾인 채로 땅 아래 호수를 향해 몸을 구부리는 나뭇가지는 여전히 신비롭게 보인다. 이 저수지에게도 사람들이 선뜻 믿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 잘 믿지 못한다고 해서 대단한 비밀이란 얘긴 아니지만, 그 이야기를 몇 사람에게 했을 때 하나같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보여줬다는 것은 사실이다. 허황된 얘기를 늘어놓아 믿게 만든 다음에 거짓말이라며 놀리곤 했던 동반자가 믿지 않았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상류로 올라가는 오른편 길에서 연리지를 보여주고, 또 큰 바위를 뚫고 자라는 나무들을 함께 보았던 최근의 동행들마저 믿지 않았다. 의아해하면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내 표정과 말투가 진지해질수록 점점 더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저수지 바닥에 작은 동네가 있다. 대부분의 저수지가 처음부터 저수지가 아니었던 것처럼 여기도 농수 확보와 호우 대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지금 저수지의 양편에 있는 길들 역시 예전에는 샛길이었거나 그냥 산허리였다. 적당한 골짜기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자 길과 민가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농번기나 가뭄 때문에 수위가 낮아지면 상류 부근에는 작은 시골다리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 다리는 자기 다리 아래로 흐르는 작은 개울이 자신을 덮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수면 위로 전신주의 윗부분이 솟아오르는 때도 있고, 저수지를 만들 때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들이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러 잘린 허리를 내밀기도 한다.

수중탐사를 통해 저수지에 잠긴 집과 길을 살펴보고 증거가 될 만한 사진을 찍어올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은 나뭇조각마저 오래 보존하니까. 별다른 쓸모는 없겠지만 몇 점의 유물을 발견할 테고, 새로운 토착민들이 마을 터를 집으로 삼고 살아가는 광경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과 집이 잠기고 물길은 막힌 곳에 새로운 생명체들을 위한 더 넓은 세계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 원대한 탐사계획은 여러 이유로 상상을 즐기는 선에서 종결되었다.

 

까마귀와 토끼가 같은 하늘에 떠 있다가 까마귀가 먼저 땅속으로 들어가면 토끼는 더 높이 떠오른다. 그렇게 저녁이 불러낸다. 밤이 오늘 길에 마중을 나가기 위해 실컷 자느라 피곤해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구둣솔로 문지르면 간지럽다는 투로 “지긋지긋” 소리를 내는 오래된 군화를 신고 나섰다. 저녁 공기는 저녁이 아니면 마실 수가 없다. 그리고 낚시터에 의자 대용으로 쌓아둔 돌덩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못이기는 척 밤에 불려 나가야 했다.

저수지의 왼편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갈래이다. 우선 오남초등학교 뒤편의 샛길로 빠져 오동나무 잎보다 더 큰 잎을 가진 나무와 돌담 사이를 끼고 오르는 길이 있다. 시기에 따라 같은 종류의 풀꽃이 교대로 피면서 철마다 온통 보랏빛, 노란빛으로 뒤덮이는 작은 언덕이 나온다. 물론 사계절 중 밤에 해당하는 겨울에는 하얗게 변한다. 또 부근 마을의 골목길을 따라가는 길이 있는데, 여기엔 재미있는 개들이 산다.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담벼락 안에서 널을 뛰듯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녀석과 그 가족이다. 그 꼴이 밖에서 보면 여간 우습지 않아 ‘널뛰기 가족’이란 애칭을 붙여주었다.

 

주변의 산이 연초록이 되는 봄이나 불그스름해지는 가을이 아니라면 밤이 나은 이유가 있다. 저수지는 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스파랜드와 팬션이 들어섰고, 팔현리에 사는 젊은 부부의 말로는 “비싸기만 하고 손바닥만 한 스테이크”를 파는 카페도 생겼다(나중에 가보았지만 그 곳은 생각 외로 괜찮았다). 들꽃이 줄지어 피던 둑에는 가로등과 인공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펜스가 둘러쳐져 이제 둑 아래 돌무더기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맥주를 쏟았다고 누구를 놀리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괜찮은 장소나 경관이 소문을 타게 되면 서운해하는 심리에는 훼손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소유욕이 작동하는 것 같지만, 이 경우도 좀 다르다. 그래도 그런 구조물들이 밤에는 운치를 더하는 조명이 되어주니 비난은 이 정도로 줄여야겠다.

 

대개 사람들은 물을 만나면 돌을 던져 인사하는 습성을 보인다.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파문을 그리고, 새하얀 눈에 발을 찍어 무늬를 새기려 한다.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복욕과 파괴충동에서 비롯된 것 같은 이런 행위는 결국 존재를 표시하며 세계에 개입하려는 욕망과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무례함이 예술의 근원과 통한다. 멀게는 산길을 가다 바위가 겹쳐 만들어진 굴을 보면 그 안을 들여다보려는 심리와도 관련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대한 예술의 일부가 되는 방법이 있다. 낮과 달리 물로 가득 찬 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저수지의 밤은 그런 경험을 제공한다.

* 나와도 많은 밤을 보낸 소닉 유스(Sonic Youth)의 ‘Superstar’는 1959년에 발표된 딜레니 앤 보니(Delaney & Bonnie)를 1994년 다시 태어나게 했다. 그것은 완벽한 배반이었고, 성공한 변신이었다. 전혀 다른 색깔의 페인트로 칠한 덧씌움(cover)이었다. 원곡조차 스스로 발견하지 못해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던 매력을 자기네 방식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발견을 넘어 발명해냄으로써, 아예 전복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 대표사례이다. 더구나 많은 이들과 밤을 함께 하면서 또 하나의 ‘오리지널’이 되고 말았다.

 


인터넷에 접속해 블로그에 싱거운 댓글을 달지 못하고, 방울이 달린 모자를 파는 가게를 찾을 수 없으며, 헬스클럽도 없다. 그러나 덕분에 뭔가에 마음조리지 않아도 되고, 점원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며, 자가용을 몰고 헬스클럽까지 가서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기이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이함에서 탈출하고자 집에 러닝머신을 들여놓는다. 그리고 얼마 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빨래건조대로 짧은 생을 마감한 러닝머신의 참극을 관람한다.

 

저수지에선 불카누스가 대장간 굴뚝으로 불길을 뿜어내는 장관을 볼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덕에 용암과 화산재를 피해 다니는 수고는 덜 수 있다. 게다가 달빛 일렁이는 저수지는 생각처럼 어둡지 않다. 고맙게도 달은 공휴일에도 쉬지 않으며, 보름달이라도 뜨는 날엔 도시의 밤거리보다 밝아진다. 지상에 살다보니 생각하기 힘들지만, 물속에서도 달은 보인다. 수중 생물들 역시 가끔 달을 보며 싱숭생숭해하는 것이다. 상류 부근을 동반자와 걸어 건너다가 그 어떤 사진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원시의 달빛과 마주한 적이 있다. 천마산 정상의 산봉우리들 위에 떠오른 거대한 보름달은 우리를 카스퍼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er David Friedrich)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로 점찍었다. 그때 시간은 가던 길을 멈추었고, 우리가 걸음을 이어가자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밝아도 열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달빛은 생장에 관여하지 않는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선 모닥불이 필요하고, 일단 불을 피우면 제법 바빠진다. 저수지에서 만난 일행처럼 느껴지는 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섭섭해지기 때문이다. 모닥불은 여름밤은 물론 겨울밤까지도 거뜬히 날 수 있게 할 정도의 보온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마와 달걀을 효과적으로 고문하는 부뚜막이다. 성공적인 불길을 보면 스스로 으쓱해지면서 자신이 대견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덤으로 고작 몇 시간 만에 탄내를 듬뿍 뒤집어쓸 수 있고, 잔뜩 흙투성이가 된 신발도 가질 수 있다. 물가에서 밤을 보내는 행위는 제의와 비슷해서 홍조 띈 얼굴로 불을 응시하며 정화되는 기분을 얻었다. 연기는 제단의 향처럼 피어올랐다.

역시 자기 몸을 태우느라 홍조 띈 친구의 양해를 얻어 전혀 다른 의미의 모닥불을 생각하기도 한다. 국가니 국익이니 성장이니 하는 말 뒤에 모습을 숨긴 자들을 위해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도록 무수한 장작들이 태워진다. 그들은 국민이란 명찰을 달았다가 아침이면 재가 되어버린다. 작은 촛불에는 찬물을 끼얹지만 장작불에는 기름이 부어지고, 저 옆에는 훌륭한 불쏘시개가 될 운명으로 키워지는 작은 나무들의 묘목장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아름다운 사회의 풍경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생각을 많이 하는 건 아니다. 병적인 메모광답게 갖가지 메모들로 컴퓨터와 노트와 수첩을 성가시게 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쓸데없는 발견들과 너무 어려운 주제들, 그리고 기발하나 기괴한 비유들이 대부분이지만, 어쨌든 메모는 보조 드라이브처럼 과부하를 방지한다. 술에 취해 동네를 헤매다 멋진 나무 앞에서 예의를 차린답시고 모자를 벗었던 밤에는 중요한 영감을 잊지 않으려 중얼거리며 돌아왔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 깨끗이 지워졌다. 사실 술에 좀 취하면 손가락에서 글자가 발사되듯 글이 써지지만, 가끔은 미련 없이 세기적인 표현을 잊어버렸다. 기억하고자 하는 건 기억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 만이다. 저수지에서는 그런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시간이 녹아 사라지는 밤에 마음은 비워지고 채워지면서 넓어진다. 그냥 구름이 흐르고, 그냥 바람이 분다.

이런 밤에 잠들어있던 무엇이 눈을 뜬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대적 상태가 아니라 본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밤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수면에 이상하고 거대한 무늬가 그려져 저수지가 살아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 관찰했고, 검은 물속에서 사슴물고기가 튀어 오른다거나, 모래뱀이 천천히 미끄러지듯 헤엄치는 광경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그린 카네이션(Green Carnation)의 ‘The Burden Is Mine Alone’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한번은 그레이 레이스(The Grey Race)의 ‘Jumping In’을 떠올렸다가 아차 싶어 그만뒀다.

* 그레이 레이스(The Grey Race)는 남태평양의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싱어송라티어 존 달링(Jon Darling)과 대서양에 걸쳐 있는 뉴욕의 토박이 제프 힐(Jeff Hill), 그리고 태평양을 바라보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이리어에서 10년 동안 활동한 에단 유뱅크스(Ethan Eubanks), 이렇게 지구의 세 모서리들에 있던 세 남자가 뉴욕 브루클린에서 하나가 된 밴드이다. 이들의 앨범 [Give It Love]에 낮은 읊조림이 누군가의 방을 위로하듯 채워주는 ‘Jumping In’이 뛰어 들어가 있다.

방해물 없는 수면은 건너편의 소리를 증폭하여 나르는 울림통이다. 소리만이 아니라 정적과 공포까지 풍요로워진다. 잔소리 없는 생명들 속에 둘러싸이면 가본 적 없는 고향의 품에 안긴 듯 포근했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따금 개구리가 물에 첨벙 뛰어들어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줬을 뿐이다. 그 때 반딧불이 마실 나왔다. 하늘을 올려보다 별빛과 반딧불이 둥근 하늘에서 겹쳐질 때 별빛은 전혀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별이란 사치스러운 수사는 격에 맞지 않는다. 별들은 불쾌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별처럼 빛나는 보석은? 돌멩이는 과분한 찬사에 미안해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마무리하기 전에 반딧불은 사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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