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에 북한산성이 있다면 남한산엔 남한산성이 있다. 북한산성에서는 저항의 역사가 없지만 남한산성은 슬프지만 저항의 역사가 남아 있다. 따뜻한 봄날 남한산성입구 전철역에서 인도를 따라 걷는다. 수도권 전철역들 중 ‘입구’가 붙어 있으면 대부분 거리가 멀다. 인도를 따라 걷는 데 상점도 많고 노점도 많다. 그러고 보니 이 지역이 시장으로 출발해 도지사, 대선 후보까지 올라간 인물이 있는 곳이다.

 

한참 걸어 산성공원에 도착해 간식을 먹고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곳곳에 의자들이 놓여 있다. 예전에 자릿세를 받는 음식점이 많이 있었을 법하다. 왼쪽 평탄한 도로 대신 영도사 절 방향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귀룽나무가 일찍 이파리를 드러내 앙상한 숲에 녹색 물감을 뿌린 듯하다.

제법 올랐는가 싶었는데 멀리 왼쪽으로 산성으로 향하는 구불구불 도로가 보이고 차량들이 올라간다. 쇠딱따구리, 박새 등이 보인다. 쉼터에 도착했는데 검단산과 지화문(至和門, 남문) 갈림길이다. 잠시 하남의 검단산인가 했는데 성남에 있는 산이고 남한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오른쪽으로 검단산, 망덕산, 이배제고개, 갈마치고개로 이어진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다음에 한번 가야겠다.

 

성곽을 따라 왼쪽으로 걸어내려오니 남문이 나온다. 남한산성 4대문 중 가장 크고 현판이 남아 있다. 문 앞에는 45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궁궐을 나와 이 곳으로 피신한 문이라 한다. 남한산성은 백제,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요새였다.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까지 3.8km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평탄한 도로와 함께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다. 한강 남쪽 서울과 성남시가 내려다보인다. 운무에 가려 북한산이나 도봉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팔당 예봉산과 하남 검단산은 눈에 들어온다. 가족 단위로 나들이나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도중에 지휘와 관측을 하는 수어장대도 둘러본다. 5개 중 한 개만 남아 있다. 동남쪽 축성을 담당했던 이회 장군이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자 그의 부인은 한강에 몸을 던졌는데 둘을 기리는 사당인 청량당이 있다. 임진왜란 중에도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던 이순신처럼 어느 시대나 권력을 중심으로 중상모략이 판을 치는 게 인간사 아니었을까?

 

걷다보니 ‘길과 길 남한산성 옛길’…“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라는 안내문이 보인다. 후대의 왕들이 세종의 영능(英陵)과 효종의 영능(寧陵)이 있는 경기도 여주에 성묘를 위해 오가던 길이자 보부상들이 넘던 길이라 한다.

 

남문과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문이 있는데 서문이다. 큰 수레는 드나들 수 없는 암문처럼 보인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문으로 짐작한다. 국왕은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며 국정을 살피는 탓에 오른쪽에 위치하므로 우익문(右翼門)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조 15년(1637년)1월 30일,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해 나섰던 곳이고 슬프고 한 많은문이었을 것이다. 청 태종은 인조가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는 험준한 등산로를 통해 삼전도로 내려오도록 서문을 선택했다고 한다. 청나라 군인의 삼엄한 감시 속에 인조의 뒤는 소현세자가 따르고 있었을 테고. 청나라 12만 대군에 맞선 1만 3천 조선군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해야만 했다.

 

‘숯과 매탄터’라는 안내문에는 “농성의 필수연료, 숯의 보관소”라는 설명이 있다. 농성(籠城)은 적의 침략으로 포위되었을 시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인데 오늘날 시위나 투쟁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옥쇄파업’이 가장 합당한 비교일 것 같다.

발레리나 슈즈 모양의 빨간 꽃인 올괴불도 여기저기 피어 있다. 노루귀도 쌓여 있는 마른 잎을 뚫고 피어났다. 지난 해 떨어진 도토리가 빨갛게 싹을 틔우고 있다. 몇 차례 남한산성에 갈 때마다 소나무가 무성하고 잘 가꿔져 있다고 생각했다. 재선충 예방을 노력이 남달라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면 유명한 유적지이고 세계문화유산이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새로운 발견을 했다. 바로 표지판에 ‘나무를 지키는 금림조합’에 대한 설명이다. 오래 전부터 산성 주민들의 숲을 지키기 위한 노력 덕분인데 주민들이 도벌을 막기 위해’ 산림감시원(산감 : 山監) 50명을 선발하고 매일 6명이 산림을 감시하게 했다는 것이다.

 

산감은 취약계층 구제차원에서 극빈자 중에서 선발했으니 그들이 가난 때문에 나무를 도벌하지 않도록 한 방법이기도 했을 터다. 2016년까지 90여년간 이런 노력을 이런 노력을 했다고 하니 100년 넘은 소나무가 남한산성 여기저기 독야청청 뻗어있는 게 아닐까 싶다.

‘전승문’인 북문에 도착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가장 큰 패전을 했던 문인데 정조 때 성문을 개보수하면서 그런 아픔을 잊지 말자고 붙인 이름이다. 복구작업으로 해체 공사 중이라 예전 모습을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번 복구 후에는 뭐라고 붙이려나. 평탄한 산책길은 여기까지다. 여기서부터 벌봉, 남한산 정상까지는 성곽을 따라 걷는 등산로다. 제법 가파르다. 곳곳에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은 본성,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5개의 옹성으로 이뤄져 있다. 그 중 봉암성은 벌봉 일때를 포괄해 쌓은 외성(外城)이다. 봉암성을 나와 허물어져 가는 외성을 따라 걷는다. 벌봉에 오른다. 남한산성 내부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인데 당시 청군에 이 봉우리를 빼앗겨 불리한 상황에 처했다 한다.

 

지난 번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남한산 정상 표지석이 없어 헤맨 적이 있는데 이번에 와보니 정상에서 100m 떨어진 평평한 곳에 ‘남한산(522m)’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기아차 판매 내부고발자 부당해고, 울산대학교 장례식장 조리원 부당해고, 서면시장번영회 부당해고, 택시노동자 고공농성 300일 투쟁지지 인증샷을 찍고 동문으로 하산한다.

동문은 서문의 반대 방향이라 좌익문(左翼門)이라 부른다. 산성에서 광주방향으로 통하는 도로가 뻗어 있다. 행정구역은 남한산성면 산성리다. 특이하게 산성 내 모든 수로가 통합되어 석축을 쌓은 암문으로 흘러나가는데 적이 침입할 수 없도록 쇠침을 박아 두었다 한다. 예나 지금이나 끝없는 전쟁의 흔적이다. 남한산성 계곡과 능선에서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부모형제자매와 고향을 그리워 하며 죽어갔을까?

 

해는 벌써 서쪽 산으로 넘어갔다. 붉게 물든 하늘에 검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다. 저녁이 되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써늘해진다. 경기남부에서 경기 북부 집까지 가기에는 멀다.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다. ‘산성순두부집’으로 들어간다. 92년 전인 1930년 몇 개 있었던 남한산성 식당 중 가장 먼저 두부장사를 시작하여 3대째 운영중인 100년 전통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산에 왔는데 역사 공부하고 있는 느낌이다.

 

순두부를 시켜놓고 바깥을 내다보는데 ‘서흔남묘비’ 간판이 보인다. 서흔남이 누구일까? 인터넷을 쳐보니 병자호란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이 나와 있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을 예상한 조정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 당시 강화도로 피신한 방식으로 중요한 짐들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눈치챈 청군대가 사전에 강화도로 가는 길을 봉쇄하면서 인조는 부랴부랴 나룻배를 타고 하남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눈이 내리는 궂은 날씨에 교대로 왕을 업고 가는 신하들이 지쳐 있을 때 하남에 살던 노비로 기와를 굽고 살던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사람이 왕을 들쳐 업고 남한산성의 남문을 통해 안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그는 적을 속이기 위해 나무 나막신을 거꾸로 신고 걸었으며 이후 청군대가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변장하여 바깥을 드나들기도 하면서 왕을 보좌했는데 왕은 서흔남에게 자신이 입던 곤룡포를 하사하고 종2품의 벼슬을 내렸다 한다.

 

이후 묘는 이장했는데 비석은 산성 내에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서울 송파도서관 앞에도 ‘인조와 서흔남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위의 역사 이야기가 모두 정사인지는 전공자가 아니고 공부가 부족해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가 있는 산에 갔다 왔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옮겨보았다. 여하튼 남한산성은 몇 차례 더 가 봐야 할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등산객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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