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25 행주누리길(성라산, 지렁산, 봉대산, 덕양산<행주산성>)

 

하루 전만 해도 파주 박달산으로 가려다 출발하는 아침에 강화 마니산으로 산행계획을 바꿨다. 그런데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며칠 전 배터리 방전으로 세워뒀다 어제 겨우 보험사에 연락해 충전해 뒀는데 하루 지나고 나니 역시 마찬가지다. 중고차 구입 후 말썽이다.

 

늦게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선지라 대중교통으로는 어림도 없는 시간이고 다시 들어갈 수도 없다. 아파트단지 안에서 서성이다 산 대신 익숙하지 않은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집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는 ‘행주누리길’이다. 먼저 3호선 전철이 지나는 성라산 서쪽 등산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산은 야트막한데 지난 8년 전 이사 온 뒤 등산보다는 약수를 받으러 가는 곳으로 익숙하다.

 

며칠 전 쌓인 눈이 강추위에 녹지 않은 채 쌓여 있어 약간 미끄럽다. 차가운 날씨지만 하늘은 푸르다. 가끔씩 전철이 지나간다. 낙엽을 모두 떨 군 벚꽃나무가 눈밭에 서 있다. 나뭇가지에는 식목한 일자와 사람 이름이 적혀 있다. 봄 말 전철이 지나가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꽃잎이 휘날리는 상상을 해 본다.

 


 

지금 사는 동네가 화정(花井)동인데 친절하게도 등산로에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화정은 옛 고양군 지도면에 속항 행정, 법정 동인데, 화수촌(골머리), 냉정(찬우물), 백양동(뱅골)의 3개 자연촌락이 있었으며 일명 능곡배가 특산물이었다. 화정이란 이름은 ‘꽃 우물’인데 유명한 화수(花水)와 냉정(冷井)에서 한 자씩 따 붙여진 이름이다. 도시화 이전에 화정마을은 뒤로 국사봉과 지렁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개울이 흐르며 기름진 논과 밭이 있던 살기 좋은 곳이었다. 1990년대 초반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이루어져졌다.

 

성라산 등산로를 따라 내려와 동네와 논밭을 지나 다시 산을 오르니 지렁산 지석묘 이야기가 표지가 보인다.

 

행주누리길 지렁산 정상부 부근에 위치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 고인돌 유적이다. 처음 학게에 보고된 것은 1990년대 초반 화정 신도시 개발에 따른 문화유적 조사 중 서울대 박물관에서 보고서를 통해 발표하면서부터다. 이후 조사를 통하여 고인돌임을 확인했다. 부장품 등은 이미 오래 전에 훼손되어 그 원형을 볼 수 없으며 누리길 사이로 덮개돌과 받침돌이 보이는 고인돌 수 기가 남아 있다.

 

 

지렁산을 내려와 동네길을 걷는다. 곳곳에 주말농장이 보인다. 건너편으로 서울-문산 고속도로 차들이 굉음을 내며 달린다. 한 참 걷다보니 좁은 우리에 양, 염소, 당나귀가 보이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배다골 테마파크’다.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다. 크리스마스날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나온 모습이다. 나에게는 벌써 30여 년 전 기억이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하다.

 

 

길을 따라 조금 걷다보니 ‘성사천’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서쪽 640m 지점에 ‘가라산’ 정상 표시가 있다. 한강 하구를 낀 서해안 지역이라 높이가 100m도 안 되는 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천변 눈 쌓인 자전거길을 따라 걷는다.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에 흰뺨검둥오리가 헤엄을 치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양쪽으로 아파트가 서 있어 확 트이지는 않지만 하늘은 푸르디푸른 색깔이다.

 

성서천이 끝날 무렵 경의중앙선 강매역을 만난다. 철길을 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 교통카드를 찍고 들어갔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다시 교통카드를 찍고 나온다. 나야 무료 교통카드라 부담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일반 교통카드로도 요금 부담 없이 통행하게 되어 있다. 바깥으로 나오니 고가도로를 만나고 행신역쪽으로 거대한 수도권 철도차량기지가 펼쳐진다.

 

곧 바로 가면 강매1리로 이어지지만 행주누리길은 봉대산을 거쳐 가도록 되어 있다. 정상에는 ‘강매동 해포봉수(江梅洞 醢浦烽燧)’에 대한 상세한 설명 표시가 있다.

 

해포봉수는 강매동 봉대산 정상에 있던 봉수, 봉화대의 이름으로 봉수란 연기로, 봉화는 불빛으로 신호를 전달하는 전통시대의 통신수단이다. 봉대산 정상은 해발 96m로 이 곳에서는 일산의 고봉산 및 고양 북한산, 서울 모악산, 관악산, 화전 대덕산, 행주 덕양산, 인천 계양산과 한강을 볼 수 있다. 봉수의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지형적으로 요지에 자리해 있다. 해포봉수는 조선시대 제3 노선인 일산 고봉(高峰)봉수를 받아 서울 모악(母岳)봉수로 전달했다. 해포라는 명칭은 봉수대 아래 강고산 마을 입구의 창릉천에 있던 큰 포구의 이름에서 붙여진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는 봉수대의 흔적인 기와 파편을 볼 수 있다.

 

‘강매동(江梅洞) 매화정(梅花亭) 이야기’도 빼 놓을 수 없다.

 

이 곳 매화정 마을은 고양시 덕양구 행신2동 강매동에 속한 자연촌락 이름이다. 강매동은 이 곳 큰 마을인 강고산(江古山)과 매회정에서 한 글자씩 따 붙여진 이름으로 봉대산을 뒤로 하고 마을 앞으로는 성사천이 있어 오래 전부터 사람이 거주한 전통 마을이다. 임진왜란 행주대첩의 명장 선거이(宣居怡)장군의 후손인 보성(寶城) 선씨가 대규모로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잇다. 이 곳 매화정 마을은 경치가 아름다워 매화꽃이 유명한 매화정 정자가 있어 마을 이름도 매화정아라 했다고 한다.

봉대산 정상에서 석양에 물든 행주산성과 한강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은 평화롭다. 공동묘지 사이로 만든 길을 따라 하산한다. 지난 주 올랐던 북한산 백운대에서 발원하여 행주산성까지 흘러 한강과 합류하는 창릉천을 만난다. 그리고 ‘고양 강매 석교(石橋)’에 당도한다.

 

고양 강매 석교는 옛날 한양을 잇던 돌다리로 현재 고양시에 남아 있는 유일한 옛 돌다리다. 이 석교가 세워진 강고산 마을은 옛날 한강의 새우젓 배들이 고양지역 사람들에게 판매할 새우젓을 내리던 동네였는데, 그 나루터는 샛강 건너 갈대섬에 있었다고 한다. 갈대섬의 나루터는 한강의 깊은 수심에 접해 있어 배를 대기에는 용이하였으나 강고산 마을로 건너가는 것이 불편하여 현재 위치에 석교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석교는 가운데 부분을 양끝보다 높게 만들어 전체적으로 약간 둥근 모습인데 이는 우리나라 전통다리형태인 우물마루 돌다리 양식이다. 교판석 가운데에 ‘강매리교(江梅里橋) 경신신조(’庚申新造)라고 새겨져 잇어 1920년에 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 강매석교는 한국의 전통 돌다리 조성방식과 구조가 근대에도 유지·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석교를 지나 마을로 접어들자 ‘뚝방슈퍼’가 보인다. 오후 3시가 넘어가니 배가 출출할 때라 잔치국수를 시켜 먹는다. 뜨끈한 국물에 말은 국수를 잘 익은 김치를 곁들여 후루룩 먹는다. 그리고 믹스 커피 한 잔 타서 마시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다. 다시 걷는다. 행주산성이 눈앞에 보이지만 한참을 걸어야 한다. 배수지 옆을 지나 새롭게 조성되고 있는 수변 공원길을 걷는다. 자전거도로를 만나고 행주산성 진강정으로 오르는 입구에 당도한다.

 

행주산성(덕양산)도 해발 100m 조금 넘는 낮은 산이지만 한강에 인접해 있어 보기보다 가파르다. 임진왜란 당시 전략적 요충지가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진강정에 오르자 석양이 한강 건너 개화산을 넘어가며 강물을 비롯해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자유로에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오가고 있다. 서울의 강변북로와 이어지는 자유로는 한강 하구의 둑 역할을 한다. 걸어온 길을 내려다보니 자유로 둑 안쪽으로 넓은 수변이 내려다보인다.

 

행주산성을 여러 번 올랐지만 둑이 만들어지기 전에 한강 하구가 얼마나 넓었는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짐작이 간다. 강매석교에 새우젓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니 한강 하구는 가히 서해안 바닷가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청 근처가 주교동(舟橋洞) 즉 ‘배다리’였으니 한강 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한강물이 개울까지 들어오니 배로 다리를 만들어 성사동을 오갔다고 한다.

 

인증샷도 찍고 석양을 즐기고 있는데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날씨 탓인지 관광객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서둘러 하산한다. 정문 바로 옆 권율장군 동상이 그림자 속에 어둑하게 보인다. 1592년 5월 23일 왜군이 부산포에 도착해 파죽지세로 한양으로 진격하자 선조는 보름만에 임진강을 건너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쳤고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하기도 했다. 절대 권력을 행사했으나 부패했던 지배세력들의 진면목을 역사는 전하고 있다.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12일(음력) 병사 2300명으로 3만 왜군에 맞서 싸워 이겼다고 기록한다. 선조는 이 해 4월에 왜군이 한양 이남으로 철수했는데도 10월이 되어서야 되돌아 왔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전쟁은 수많은 민중들의 고난과 희생이 있었음을 행주산성 주변의 무연고묘는 증언하고 있다. 지금 서울은 현대판 한양 도성이다. 그러나 굽이굽이마다 민중의 피가 씻겨 내려갔던 한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는데 석양이 행주산성과 한강을 넘어간다. 계획도 없이 걸었던 행주누리길(11.9.km)에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강물과 함께 흐르는 역사를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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