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예술, 그 험난한 삶과 음악의 주체되기>

콜텍 노동자들의 아주 긴 노래

 

글 : 나도원

 

 

※ 이 글은 고 임재춘 동지의 단식 42일, 투쟁 4,464일 만에 콜텍 노사가 합의서에 서명한 2019년 4월 22일에 마무리되었으며, 《황해문화》(2019 여름호)에 실렸습니다.

※ 기타노동자 임재춘 동지의 아름다운 삶, 투쟁을 기리며 영면을 기원합니다.

 

 

고프다 고프다 배가 고프다

아프다 아프다 맘이 아프다

서럽다 서럽다 삶이 서럽다

– ‘콜밴’, <고공>에서

 

 

‘쏜 살처럼 빠른’ 혹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처럼 관용구가 된 비유들이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쏜 살’을 본 사람은 많지 않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경험을 해본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다시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표현들의 최초 발화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적지 않은 경우는 고전(古典)에서 비롯되었으나, 기록되지 않은 표현들에도 평범한 발화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혹자의 괴상한 비유가 얼마나 기발했으면 이렇게 계속 회자되며 이어져왔겠는가. 누군지 모를 그들은 무명의 발명가였던 셈이다.

 

 


콜트콜텍 투쟁’, 예술인에게 짐과 길을 주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기타 생산업체 (주)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 씨가 콜텍 본사 앞에서 단식농성 중일 때이다. 2012년경부터 콜트-콜텍 투쟁에 작은 목소리라도 보태려 했으니 2019년을 기준으로 하면 사적으로도 7~8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꽤나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당사자들에게는 오죽할까.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삶과 가정이 파괴된 13년, 그 시간의 무게와 어둠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임재춘 민주노총 금속노조 콜텍지회 조합원의 단식이 한계치를 넘어서고, 2018년 12월부터 이어진 노사교섭이 해고노동자들의 끝장투쟁 선포와 단식농성 이후에야 재개되어 연일 계속되는 와중이었다.

 

 

“이제 콜텍 차례네요.”

“잘 좀 해봐!”

 

2019년 1월 11일, 지난 수년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굴뚝농성 834일을 기록한 끝에, 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된 눈물을 흘리는 굴뚝 아래에서 ‘파인텍’ 고공농성이 풀리던 날, 콜텍 해고노동자 이인근 씨와 나눈 인사는 저랬다. 쌍용자동차, 스타케미컬-파인텍처럼 무수한 희생과 길고 긴 투쟁 끝에 노동자들이 하나둘 복귀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그런 장소에서 건네받은 인사가 ‘잘 좀 해봐’였으니 지금도 무슨 뜻인지 아리송하다. 진보진영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것도 같고, 보다 열성적인 역할을 요청한 것도 같았지만, 왠지 그와는 다른 차원일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 콜텍 단식농성 돌입 첫날에 농성장을 찾았을 때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어려워 한숨 섞인 탄식처럼 말끝을 흐렸더니 단식농성 당사자의 화답은 방문자가 머쓱해질 정도로 단호했다.

 

“너무 힘든 일인데…”

“자본과 투쟁하는데!”

 

세계적인 기타 생산업체이자 흑자기업인 콜트-콜텍은 착착 진행해온 해외 공장 이전을 중심으로 한 구조조정을 완료하기 위하여 2007년에 노동자들을 일방 정리해고하고 공장을 폐쇄해나간다. 공히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열악한 처우, 심각한 성차별을 해결하고자 노동자들이 막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직후이다. 전기기타를 생산하는 콜트와 어쿠스틱 기타 등을 제작하는 콜텍은 계열사로, 두 회사 노동자들은 연대하여 ‘콜트-콜텍 투쟁’이 이루어진다. 노동자들은 긴 싸움 끝에 고등법원에서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인정받지만, 사법농단 의혹을 받는 양승태 시절 대법원은 판결을 뒤집는다.

 

박영호 사장은 노동자들을 재차 해고하고 공장마저 팔아버렸다. 국회의원 김무성은 ‘노동조합 때문에 기업이 어려워져 한국을 떠난 사례’로 콜트-콜텍을 들었다가 강력한 항의를 받은 바도 있다. 모든 공격에는 왜곡뿐만 아니라 일정 부분의 진실이 있고, 그것을 알면서도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말의 진실조차 없는, 정치적 의도와 완벽한 왜곡뿐이었다. 장기투쟁 노사분규가 문재인 정부 들어 하나둘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투쟁 현안 대부분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에 대한 법제도가 ‘편리하게’ 정비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비롯되었다.

 

근대 이전 유럽은 혈연과 혼인으로 하나처럼 엮인 대가족이 각 나라를 나누어 수탈하면서 그들끼리 국경을 놓고 다투었다. 21세기 한국 자본귀족사회의 부패상을 보면 마치 유럽 봉건 지배층과 수하들의 현대판 같다. 그들은 아래에서 위를 뒤엎기 전까지 계속 군림하고 상호 영역다툼을 벌이며 썩어갈 것이다. 역사가 그렇다. 우리사회는 진보보수 좌우구도보다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로 이루어진 상하구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콜트-콜텍의 실체,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에게 닥친 상황을 음악인, 음악애호가, 예술인들은 남다르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이 콜트-콜텍 투쟁 과정에서 결합하며, 이는 매우 중요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2008년 12월에 일주일 동안 열린 헌정 콘서트 <당신에게 삶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를 비롯하여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음악인들이 노래로 힘을 보탰다. 해외에도 알려져 2010년부터는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의 톰 모렐로Tom Morello, 잭 드 라 로차Zack de la Rocha 등 세계적인 음악인들의 지지가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2019년 3월에 인디음악동네 대표밴드들이 모인 합공공연 <콜텍 노동자 복직을 위한 LIVE AID 기타를 던져라!>까지, 그리고 대중음악계 전반의 지지가 2019년 2월에 이인근 콜텍 지회장이 시상자로 참석한 제16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까지 지속되었다.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은 2011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정 상영되었고, 2012년에서 2013년까지 미술작가와 문화활동가들이 콜트악기 부평공장을 점거하여 예술해방구로 만든 스쾃Sqaut이 시도되었다. 해고노동자 당사자들이 직접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다음은 2013년 10월, 바로 그 연극 <구일만 햄릿> 초연 다음날에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기록해두었다가 이번에 다시 정리한 것이다.

 

 


다큐 <꿈의 공장>과 연극 <구일만 햄릿>

 

“어제 공연은 어땠어요?”

“첫날이라 사람들이 많이 왔죠. 물론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 모이는 가족잔치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뭔가 해냈다는 분위기는 있었어요. 연기자들은 다들 한 번 이상씩 틀렸어요. 특히 주인공 햄릿이 많이 틀렸죠. 이젠 암기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서울의 유서 깊은 동네들 중 한곳인 성북동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다큐멘터리 <꿈의 공장>을 만든 김성균 감독을 만났다. <구일만 햄릿>에도 그의 손길이 묻어있다. 김성균 감독은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인연이 깊다. 그의 다큐멘터리 <기타 이야기>(2009)와 <꿈의 공장>(2010)이 모두 그들을 지켜보며 기록한 작품들이다. 제목들은 중의를 품고 있다. <기타 이야기>의 기타는 기타(guitar)이면서 기타(其他)였고, <꿈의 공장>에서 ‘꿈의 공장’은 악덕 자본가 박영호가 자신의 공장을 일컫던 말이기도 하다. 특히 <꿈의 공장>은 사회적으로 콜트-콜텍 문제 공론화에 기여했다. 2011년에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진보상을, 2012년에는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받았다.

 

김성균 감독은 <다른 세상을 꿈꾸다 – 아줌마 교사되다>(2008)를 연출한 RTV에선 대안공동체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 대상들 중 하나로 홍대 앞에 있는 클럽 ‘빵’이 선정되었다. 인디음악인들을 인터뷰해나가던 중에 어느 노동자가 ‘우리 이야기도 다큐를 찍어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기륭투쟁’이나 ‘콜트-콜텍’ 관련한 사진 한 장 쓱 보내주고는 영상으로 만들어보라고 제안하는 식이었다. 콜트-콜텍 투쟁도 당시엔 500일이나(!) 되었으니 한번 해보자는 제안이었는데 점점 일이 커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가 <기타 이야기>이고, 이를 토대로 추후 보완하고 확장하다가 별도 작품으로 만들 정도가 된 것이 <꿈의 공장>이다. 이렇게 기타가 중심이 되는 장르인 록음악 마니아였던 김성균 감독이 기타 만드는 노동자들을 위한 영상을 만들게 되었다. 나아가 특정 사안을 넘어 악기 생산의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즉 주문자 상표부착 생산방식을 공론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지구적 수탈구조 문제를 드러내고자 했다.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구일만’의 뜻은 9일 동안 콜트-콜텍의 이야기에 맞춰 각색한 <햄릿>을 갖고 당사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극장 사정상 10월 한 달 동안 8일만 가능하게 되었으니 실제로는 ‘팔일만 햄릿’이 되었다. 이 과정까지 다큐로 제작하고자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가들의 노력과 작업이 부당해고를 해고할 수 있을까 묻자 김성균 감독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구일만 햄릿>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에 신중했고, ‘연극하니까 시간 빨리 가고 좋네’라던 어느 당사자의 말을 전하는 표정에는 안타까움마저 번져갔다.

 

“해외원정투쟁에 동행하며 촬영하던 중이었죠. 샌디에이고를 지날 때였는데, 운전을 해주던 멕시코 출신 이민자가 동네 구경을 시켜주더군요. 고가도로 기둥 벽면에 혁명가들의 그림들이 있었죠. 철거투쟁을 벌이면서 남은 것이래요. 패배했지만, 그래도 그림은 남겼다고…. 사실 그 장면을 <꿈의 공장>의 엔딩으로 쓰려다가 그만뒀어요. 싸우는 분들 힘 빠지게 할 것 같아 미안해서….”

 

 


*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23242

 


기타 만드는 사람들에서 노래 만드는 사람들로

 

10년을 넘기면서 회의와 불안이 번져갈 무렵, 2011년 12월에 콜텍 해고노동자들이 밴드를 결성한다. ‘콜텍 해고노동자 밴드’, 일명 ‘콜밴’을 만들어 새로운 활동을 더한다. 공장에서 기타를 만들기만 하던 노동자들이, 놀랍게도 연주할 줄은 몰랐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일터를 잃은 후에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또 다른 몸짓을 보탰다. 아마추어들이 모인 ‘직장인 밴드’가 아니라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밴드’는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과 연대하기 위하여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처음에는 주로 기성곡을 연주하던 ‘콜밴’은 어느새 김경봉 조합원처럼 스스로 베이스연주자라 칭할 정도가 되더니 자신들의 이야기로 하나둘 곡까지 쓰게 되었다. 그들의 <고공>과 <꿈이 있던가>에는 서글픔과 절망이 깃들었고, <서초동 점집>에는 법원에 대한 배신감이 담겼다. 긴 시간 단식농성, 고공농성 등 무엇이든 다했던 이인근 콜텍 지회장이 어렵게 꺼내놓았다는 노래, <주문>에는 간절함이 스몄다.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다고 모두 감동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가요의 ‘머니코드’처럼 영화에 ‘최루코드’가 있다. 예를 들면 가족구성원, 그러니까 애절한 장면에 나이든 아빠나 엄마, 어린 자녀 같은 이들이 등장해버리면 작품 완성도와 무관하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관객이 적지 않다. 슬픈 배경음악까지 깔리면 게임 끝이다. 눈물은 흐르는데 머리로는 ‘도대체 이게 뭐야’라며 자신에게 항의한 경험이 있는 관객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작품을 만드는 이들도 이처럼 계산에 빠지다보면, 좋은 커피를 아껴 마시려고 천천히 찔끔거리다가 순간 실수로 엎질러버렸을 때 느낄법한 낭패감에 휩싸인다. 쥐어짜기는 강요나 다름없다.

 

세상에 있는 거의 모든 노래는 자기 이야기를 풀거나, 타인에게 대입하여 그 심상을 가정해보거나, ‘그’를 등장시키는 3인칭으로 나뉜다. 어느 것이 더 우월하다 할 수는 없다. 다만 첫 번째 경우는 너무 귀하고, 두 번째 경우가 너무 흔한 것이 현실이다. ‘콜밴’처럼 기타를 손으로 만들었지만 연주할 줄은 몰랐던 사람들, 평생을 바쳤지만 ‘정리’되어버린 사람들이 스스로 ‘나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 중하다. 조금 어수룩해도 진심과 진실이 담긴 음악이라는 사실이 귀하다. 그래선지 이 새로운 발명가들 곁에는 노래하는 이들이 모여들었고, 2019년 4월 단식농성장에서도 황경하의 <희망>, 세민의 <누구보다 명예로운>이 탄생할 수 있었다.

 

 

부평공장 스쾃을 주도한 전진경 작가의 그림을 표지로 입고 임재춘의 농성일기를 중심으로 엮은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2016, 네잎클로바, 임재춘 최문선 외 지음)이란 책도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여전히 거리에서 곡기를 끊고 있었다. 투쟁 2000일, 3000일을 지나더니 4000일까지 훌쩍 넘겨버린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식은 길어졌고, 노사교섭은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싸움처럼 이어졌다. 첫날의 단호함이 점차 불안감으로, 절망감으로 변해갔다. 콜텍 노동자들은 일찌감치 여성 노동자의 자살, 남성 노동자의 분신을 경험한 터였다. 임재춘 씨는 “차라리 내가 죽겠다”는 말을 입에 자주 올리기 시작했다. 막후에선 곧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나리라는 분위기가 돌고 있었으며, 시한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 문장도 비워두었고, 오늘(2019년 4월 22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단식 42일째, 투쟁 4,464일차, 콜텍 노사는 ‘사측의 유감표명’, ‘한 달간 명예복직’, ‘합의금 지급’안에 서명했다.

 

 

나는야 주문을 걸어본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고

나는야 주문을 걸어본다 우리에겐 희망을 달라고

– ‘콜밴’, <주문>에서

 

 

그림 ㅣ 김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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