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나도원의 음악과 사회’]

무엇이 노래를 울타리에 가두었나

 

 

글: 나도원 (노동당 공동대표ㆍ경기도당 공동위원장, 음악평론가)

 

 

 

“예술가는 체제가 고용한 살아있는 방부제다.” 저혈압이 걱정될 때 건강보조제로는 괜찮을 어느 신문에 실린 문장이다. 예술단체에게 보조금의 조건으로 시위불참확인서를 요구한 촌스러운 문화행정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위 참여를 “불법천지 시위 현장에 나가 불을 지를 수는 있다”로 비약하더니 “그런 행태를 벌이면서도 예술가니까 국민세금을 지원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몰염치이거나 거지근성이다”(「권력 여러분, 강심제 먹고 여유 가지시길」, 조선일보, 박은주, 2010. 02. 18.)라며 기개를 뽐냈다. 오래전이지만, 이 신문의 대중문화 담당 엔터테인먼트 부장의 이런 강직함이 당시 어느 젊은이에게 기사가 실린 날짜를 소리 내어 확인토록 하는 친절을 베풀었기에 기억한다.

 

 


 

세상을 노래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나라마다 호칭과 습관이 다른 것을 비롯하여 연유가 있어 생겨나고 전승되는 전통처럼 대중문화와 예술 역시 어떤 식으로든 역사와 사회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TV시대이다. TV에 자주 나오는 사람이라고 TV를 많이 보진 않을 테지만, 어떤 드라마의 모델이 대통령이 되고 주연배우는 장관이 되었을 정도로 TV의 위력은 대단하다. 미국에선 아예 자녀의 실종사건을 허위로 꾸미거나 백악관에 잠입하기까지 하는 중독 증세를 볼 수도 있었다. 물론 이면에는 돈이 있었다. 이러한 TV 속에선 코미디마저 빈부격차의 일상화와 괴리를 비춰내고 있다. 음악은 더 오래전부터, 더 깊은 의미에서 그래왔다.

 

노예들이 손수 낳은 블루스와 음유시인들의 맥을 이은 포크는 대중음악의 씨앗이 되었다. 처음에 펑크는 뒷골목 청춘들의 반항 어린 고함이었고, 무기로 무기를 제압하고 독재로 독재를 견제한 1980년대에 발흥하여 록 음악계를 장악한 스래쉬메탈 또한 비례와 균형 그리고 조화를 중시하는 연주 안에 정치와 사회를 향한 저항의 메시지를 주로 담았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 정권이 영국을 장악하고, 미국에서도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정권이 득세한 1980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화된 반항’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남미의 노래운동인 ‘누에바 칸시온’과 태국의 ‘플렝 푸아 치윗’처럼 연구의 대상으로 승격된 움직임도 있다. 신을 농민의 모양새로 묘사하여 권위를 깬 미술가처럼, 다수이면서 소수 취급을 당하던 이들을 여론 주도층으로 만드는 데에 대중음악의 역할도 작지 않았다.

 

 

제목은 몰라도 누구든 평생 몇 번 이상은 듣게 될 정도로 유명한 곡들, 이를테면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가 부른 <Strange Fruit>에서 ‘이상한 열매’는 살해당한 채 나무에 걸린 흑인들의 주검이었다. 애니멀스The Animals 버전으로 유명한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의 화자는 고향을 떠나 비참한 상황에 처한 어느 여성이었다. 스미스The Smiths가 발표한 <Meat Is Murder>는 많은 이들에게 육식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은 구체적인 사건을 소재로 반전(反戰)을 외쳤고, 보수정권에 대한 지적인 비판을 모자이크 같은 리프에 끼워놓은 메가데스Megadeth와 같은 밴드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렵다. 영국 대처 정권기에는 클래시The Clash,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 모리세이Morrissey 등이 반-대처 운동을 펼치거나 대처를 공격하는 음악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밥 말리Bob Marley와 유투U2는 물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계에 분노를 표출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민중가요보다 강도 높은 메시지를 담아낸 이들이 많다.

 

 

인권 신장과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그럴듯한 카피를 달고 있는 국가시스템은 원형감옥과 같은 감시망을 공고히 하고, 일반의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Rage Against The Machine](1992)에서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의 긴장과 공조 속에서 산 채로 바늘에 꿰어진 미끼 같은 인민들에게 모멸과 복종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승려의 분신 장면을 포착한 커버아트가 그들의 정치적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각인시켰다. 이들 모두가 세계적인 대중음악 스타들이다. 특히 RATM의 톰 모렐로Tom Morello는, 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기자회견에서 “노동자 없이 기타는 없습니다, 기타 없이 음악은 없습니다, 음악 없이 삶은 없습니다, 기타노동자는 우리의 삶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콜트콜텍노동자 지지 운동에 가담한 바 있다.

 

또 노래는 냇물처럼 흐르다 웅덩이를 만나 의미가 추가되며 변형된 후에 다시 흐르기도 한다. 구전요 <누가 울새를 죽였나Who Killed Cock Robin>는 투여와 해석의 대표 사례이다. 낭독의 형태인 구비예술이 사라지고 블루스가 채록의 형태로 전파되기 시작한 복제시대에도 개인을 떠나 시대와 집단심성이 노래를 함께 완성하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한국에선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그랬다. 대중에 의하여 의미가 확장된 노래의 주인공이기도 한 한돌의 이야기도 보태볼 수 있다. 당대 사회 현실과 맞물리며 한돌이 쓰고 신형원이 부른 <불씨>를 어떤 이들이 광주항쟁의 은유로 받아들이고 <유리벽>에서 남다른 의미를 찾은 것처럼, 노래는 수용자들에 의하여 의미를 부여받으며 수면 아래의 입과 귀를 통하여 퍼져나갔다. 이름난 조각상이 관광객들의 손길로 반들반들해지고 닳아가듯이 노래는 고체로 머물지 않는다.

 

과학이 중립적일 수 없는 것 이상으로 대중음악은 더더욱 중립적일 수 없다. 물론 많은 음악양식들은 그 자체로 순수하고, 더욱 순수를 추구하는 미니멀리즘도 있다. 어떤 정신과 시대에서 태어난 블루스와 펑크에 전혀 다른 성격의 가사가 더해지면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전혀 다른 블루스와 펑크도 만들어진다. 물려받은 거라곤 이름 혹은 어떤 느낌만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인간 자체를 탐구하는 창작자들이 있고, 음악적으로 진보적인 작품을 만들지만 실제에선 적당히 타협하며 활동하는 이들이 있으며, 누구는 자본주의를 공격하는 음반을 수백만 장씩 팔아 스타가 되기도 한다. 작가가 작품을 배신하고 작품이 작가를 배신하기도 한다. 이처럼 음악은 모순적 결합이 가능하다.

 


 

음악에 대한 어떤 환상 그리고 어떤 강요

 

그렇다고 외부압력으로부터 보호하려 ‘예술은 예술일 뿐, 음악은 음악일 뿐’이라 항변하는 것은 유럽여행 가서 홍삼선물세트를 사들고 귀국하는 맘씨 고운 사위의 선행이나 마찬가지다. 대중예술과 사회·정치의 분리는 예술을 위한 보호보다는 시장과 국가가 원하는 주의사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선 정치중립성을 고려하는 것마저 기성의 정치성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만다. 자기 일만 잘하면 좋은 세상이 된다는 생각은 산타클로스가 실제로 굴뚝을 타고 내려온다는 얘기만큼만 현실성이 있다. 순수에 대한 강박은 고립된 살롱음악을 만들었고, 중립에 대한 강박은 요즘 상업영화들처럼 ‘권선’은 없고 ‘징악’만 남는 결과를 초래했다.

 

어떤 현상을 역사적 배경과 사회구조에서 분리하여 인간본능으로만 해석하면 불충분한 결과에 머문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마샬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은 “물건을 놓아버리는 힘의 발달과 더불어 말을 하게 된다. 그 힘과 동시에 환경에서 분리될 수 있는 힘도 얻는다”고 했으나, 현실은 말을 놓아버리는 방법을 습득시키고 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언어와 사실의 분리”라고 지적했다. 자연으로부터 눈앞의 나무와 새와 풀이 분리되듯이 관념과 대상이 분리되고, 의미와 결과가 분리되는 것이다. 『파리카페』(북노마드)를 보니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과 앨런 긴스버그Allen Ginsberg가 1967년에 반전운동의 일환으로 행했다는 ‘프랭크스터’도 지금은 그냥 놀이가 되었다. 보수사회에서 순수와 중립에 대한 강박은 종종 기득권 세력을 위한 봉사가 되고 만다.

 

이쯤 되면 사회 발언을 담은 음악이 더 훌륭하다는 소리인가, 혹은 대중예술은 그래야 한다는 것이냐는 오해를 품을 법하다. 대개 이해란 오해를 걷어내는 작업이기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그런 오해는 일관성이 아니라 일률성에서 비롯된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1970년에 “진정한 예술은 삶과 현실의 모순을 제기하고, 그러한 모순을 개인의 의식 속에 존재시킴으로써 그 개인을 고문한다”고 쓰면서 같은 글에 마르크스Karl Marx가 “반동적 사고에도 불구하고” 발자크Honore de Balzac를 혁명적 작가보다 더 극찬했으며, “작가가 그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면 숨길수록 작품을 위해선 더 좋다”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말까지 실어 놓는 대담함을 보였다.

 

어렵고 무거워야 진지하다는 것도 경박해야 대중이 좋아한다는 편견만큼이나 심각한 오해이다. 진지함과 무거움은 다르다. 단순함과 진솔함이 모여 거대한 감동을 만들어내는 장면과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다. 당연히 음악과 예술을 도구로 삼아 세상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거세되어온 무엇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니, 어쩌면 오히려 예술지상주의에 가깝다. 다만 순수한 음악의 강조는 좋은 태도이나 강요는 나쁘다는 말이다. 음악이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건 당연하고 그런 음악도 많다는 말이다. 음악은 도구가 아니다. 현실 자체이다.

 


 

대중예술은 이렇게 사회로부터 떼어졌다

 

그런데 왜 한국에선 대중예술과 음악이 사회와 동떨어져 다른 길을 걸어왔을까? 1920년대부터 창작이 시작되어 1930년대에 흥기를 맞은 우리 대중음악은 이미 긴 역사를 가지게 되었으나 그만큼 넓은 금단의 구역도 만들어놓았다. 공백도 역사이고 침묵도 발언이다. 하지만 대중예술인의 정치 성향 노출은 위험하다고 스스로 제한하는 ‘후진 문화’의 정착은 유난스러울 정도이다. 익히면 색이 변하는 고동색 게와 가재, 초록색 고사리를 보고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처럼, 음악은 사회와 역사와 관계한다는 당연한 사실조차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만한 사연이 있다.

 

서구에 비하면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온 기간이 짧다. 20세기 초까지 문맹률이 90%에 달했던 한국에서 조선 세종의 꿈은 500년 후에나 이루어진 셈이다. 더구나 대중적 문자문화의 시간은 반만년 중 반세기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마침내 이를 극복할 무렵, 검열의 시대가 왔다. 방패막이로 쓰이다 버림받을 소모품 주제에 예술과 음악에 대한 평결을 내리며 충성한 빨간 펜의 검열자들은 복종의 메커니즘을 구성했다. 음반마다 삽입되는 건전가요도 영화를 보기 전에 봐야 하는 ‘대한늬우스’와 같은 역할을 했다.

 

 

“민주의 광장에는 말뚝이 박혀 있고, 쇠사슬이 둘려 있고, 연설과 데모를 막기 위해 고급승용차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 고급차 뒷자리의 두꺼운 유리창 밑에서는 하얀 두루마리 휴지가 정액에의 봉사라도 기다리고 있는 듯 미소를 짓고 있다.” 오늘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시인 김수영이 1968년에 《사상계》에 쓴 「지식인의 사회참여」의 한 부분이다. 그는 또 쓴다. “문화도 수력발전소의 댐처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최고의 문화정책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제멋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그런데 그러지를 않는다. 간섭을 하고 위협을 하고 탄압을 한다. 그리고 간섭하고 위협하고 탄압하는 것을 문화의 건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오늘날의 문화계의 실정이 월간잡지 기자들의 머리 세포 속까지 검열관의 ‘금제적 감정’이 파고 들어가 있다.” 김수영은 이 글을 쓴 해에 사망했다.

 

이처럼 사실상 사상훈육을 받으며 자라는 사회에 이른바 통합이데올로기가 더해졌다. 지금도 TV뉴스 끝머리는 분열을 걱정하고 통합을 강조하는 앵커의 멘트로 마무리되고, 정당 대표들의 취임 일성 또한 한결같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관성이 되었지만,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해온 사람과 구경해온 사람이 화해와 용서 그리고 통합을 얘기한다. 실컷 두들겨 패놓고 리무진에 올라타면서 “자, 우리 화해하고 통합하는 거야!”라는 식이다.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데 어찌 화해가 가능한가. 경쟁우선사회에서 통합이데올로기는 눈가리개이자 변혁에 대한 감속장치였다. 세계화가 한국의 세계화가 아니라 제국질서로의 편입을 의미하듯이, 모든 것의 통합이야말로 진정 공포이다. 건강한 긴장관계와 다양성의 조화가 시대에 맞고, 또 현실적이다. 통합의 길을 묻는 대신 통합에 대한 환상을 묻을 때이다. 통합에의 강요는 예술과 문화를 체제와 사회정신으로부터 분리하고 음악을 사람과 사회로부터 떼어낸다.

 

 

이러한 과정과 배경에서 한때 시대정신을 반영했던 서양고전음악은, 그리고 민초의 삶을 담았던 전통음악은 순수예술이란 이름으로 보수화했고, 영화 <바이올린 플레이어>에서처럼 고립되었다. 보호와 육성을 위한 학제의 완성과 강단예술계의 형성, 그리고 지원제도의 마련이 역으로 작용했다. 순수하게 예술만 추구한다기보다는 기술 외에 다른 이야기는 삼간다는 의미의 순수예술이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고드름을 간직하겠다며 톱으로 잘라 이불로 둘둘 말아놓은 셈이다. 그래서 그들의 역할을 대중음악이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역사뿐만 아니라 주변의 개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신을 스스로 권력자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그 권력은 쇠락한다. 오만만큼 자신을 무너지게 하는 것도 드물다. 음악의 경우, 마침내 1995년의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을 거쳐 1996년에 검열의 시대는 끝이 난다. 거기에 정태춘과 박은옥이 있었다. 음악적으로도 정태춘은 음악이 시대와 어떻게 만나는지 보여주었다. 음악인이 동시대와 어떻게 싸우고 음악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자체로 보편성과 생명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오스트리아에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등이 주도한 빈 분리파의 슬로건도 이것이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자체의 자유를!

 

 

그러나 곧바로 시장논리를 절대화하는 시대가 왔다. 대중음악을 발전시켜온 시장의 강화가 어째서 당국의 검열보다 더욱 강력한 담장이 되는지는 더 길게 얘기해야겠지만, 간단히 현실의 십계명이 만들어졌다고 해두려 한다. 일계명은 수익이다. 이계명도, 삼계명도, 그리고 열 번째 계명도 모두 수익을 내라는 훈화말씀이다. 그 방법은 세 가지, ‘어려운 것은 쉽게’, ‘위험한 것은 순화하여’, ‘안 팔릴 것은 팔리게’이다. 전체주의만이 음악을 규정하고 제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곁눈질이 아닌 응시를 택하고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 선 음악인들이 적지 않다. 다만 화폐로 지은 옷을 차려입은 인파에 밀리고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여러 면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음악이 어떻게 울타리 밖으로 나오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그런 노래들이 어디에서 울리고 있는지 찾아 들춰볼 차례이다. 이것은 마른 화분에 물을 뿌리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듣는 일만큼이나, 값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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