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건수 (노동당 경기도당 집행위원)

 

 

온통 핵 이야기뿐이다. 전 정부 탓할 때도, 기후위기 대책을 발표할 때도, 안보방향을 이야기할 때도, 온통 핵 이야기뿐이다. 자본과 핵발전은 서로 닮았다. 자본은 스스로 부를 증식하고, 핵은 스스로 분열하며 에너지를 생성한다. 물론 그 대가는 매우 비싸다. 자본주의체제의 과잉생산이 결국 시장경제를 파괴하는 결말로 이어지듯이, 무한한 핵에너지 분열은 감당할 수 없는 폭발력을 방출하게 된다. 이를 제어하는 게 기술의 문제인지 정치의 영역일지 사회의 책임일지는 공방이지만, 어쨌거나 결국엔 시간의 문제이다.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이다.

 

핵 애호가 윤석열의 리스크는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사실상 용인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안겨주었다. 특히 민감한 사안마다 측근의 입을 빌려 우회적으로 입장을 표명할 뿐, 대통령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은 모여주지 않았는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안만큼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친핵이던, 반핵이던 입으로 밥 먹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오염수 방류는 심각한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대통령 혼자뿐인 듯하다.

 

이렇게 생각하긴 싫지만, 윤석열이 왜 이토록 핵을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겉으로 핵발전은 그야말로 정치적 중립의 화신이기 때문이 아닐까. 스스로 분열하며, 스스로 에너지를 만든다. 기술은 효율을 극대화하는 도구일 뿐이고, 그마저도 자동화 시스템으로 교체한다면 마치 핵발전의 그곳은 기계소리만 들리는 핵에 의한, 핵을 위한, 핵의 시간이자 공간일 것이다. 정치에 대해 잘 모르며, 심지어 정치를 거부하는 윤석열에게 정치와 인간의 개입 없이도 착실히 거대한 에너지를 뽑아내고, 또 무기로도 활용할 수 있는 핵이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하지만 핵은 그다지 우월한 에너지원이 아니다. 저렴하고, 효율적이고, 오래간다는 핵에 대한 오랜 착각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통해 다시 한 번 환기된다. 단 한 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된 대가를 태평양과 세계시민들이 감당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이다. 핵의 효율성은 그 위험성을 아래로 전가하고, ‘방류’하는 정치를 전제할 때만 말이 되는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9월에 기후정의행진이 열린다. 기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고, 무능한 정부는 재난대비에 실패했다. 현 정권 들어 안전참사가 반복되고 있는데도, 오히려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는 능력을 습득하고 있는 것만 같다. 대통령이 현장에 있었어도 참사는 그대로 일어났을 거라는 말은 곧 자기 책임 부정을 넘어 자기 존재 이유의 부정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단순히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넘어서서, 책임지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하는 대통령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시장규제 철폐를 약속하며, 시장 앞에 정치의 겸손함을 운운하고, 핵발전을 찬양하며 정치의 개입을 부정부패로 몰아간다.

 

923기후정의행진은 윤석열을 비롯한 기후위기 책임자들의 책임을 묻고자 한다.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은 그들에게 책임을 요구한다니, 실제로 조직위원회에서는 그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임을 회피하며 정치를 지우는 윤석열에 맞서, 사람의 사람 사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정치의 영역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홉스는 사회를 만인의 만인을 향한 투쟁 상태로 규정하며, 이를 위해 국가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책임지고 문제를 풀어야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줄어든다는 말이다.

 

기후위기는 아래로 고인다. 위기는 더 가난하고 취약한 이들의 삶부터 위협하고, 지금보다 얼마나 더 큰 위기가 닥칠지 모르겠지만 가장 위에 있는 이들에게 닥칠 위기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럴 때 윤석열의 책임을 묻는 이들은 더 많아져야 하고, 또 다양해져야 한다. 기계소리 윙윙하는 핵발전소에 모든 것을 의탁한 윤석열의 앙상한 정치에 맞서, 삶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하는 진짜 정치를 복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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