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진우(권리찾기유니온 위원장, 전 노동당 부대표)

 

해마다 달력에서 4월이 보이기 시작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생각 없이 셈을 해본다. 10년 전 16일은 수요일이었고, 올해는 화요일이다. 단원고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올 날은 금요일이었고, 올해는 목요일이다. 기억하는 방법이 익숙해지니 어느덧 10년이 되었고, 쌓이며 커지는 숫자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얼마 전 출간된 세월호참사 10주기 공식 기록집의 제목은 ‘520번의 금요일’이다. 제목을 처음 접하고, 520번째 금요일을 맞이하는 이들이 세상 속에 다시 전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서문을 읽어보니 미처 닿지 못했던 무언가가 전해진다. “진도 팽목항에서, 안산 합동분향소에서, 서울 광화문과 국회와 청운동에서, 목포와 제주에서, 집과 일터와 거리에서” 그렇게 520번의 금요일을 살아간 사람들. ‘절망과 희망의 시간’이라는 익숙한 단어만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 수많은 금요일의 마음들을 조금이나마 떠올리면서 많은 이들과 그 기억을 나누고 싶다”는 기록자들의 바람이 달력의 무심한 숫자들 위로 칸칸이 덮인다.

 

“10여 년의 시간을 되짚어보는 동시에 세월호에 집단기억을 만들고, 우리를 다시 구성하는 첫 걸음”을 내딛은 기록자들은 “새로운 질문과 마주할 당신”을 호명한다. 공식 기록집에 채 담지 못한 이야기와 마음들과 더욱 널리 공명하며 521번째 금요일을 함께 살아가자는 소망일 것이다.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치열하게 싸워나간 이들의 소중한 몸짓을 나름대로 기억해본다.

 

첫 번째 기억은 세월호참사의 책임을 따져 묻기 위해 ‘청와대 만민공동회 투쟁’을 제안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50여 명 제안자의 이름과 함께 “5월 8일, 청와대 앞에 모입시다”라는 호소가 처음 공개된 날은 5월 3일이다. 저들이 가두려던 사람들, 살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고 곡기를 끊고 두드려맞으면서도 처절하게 버티며 싸워왔던 사람들.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해, 생명을 지키기 위해 추모와 분노를 넘어 이제 나서서 싸워야 할 때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청와대 주변의 모든 집회 시위가 금지되던 시절에 저항의 몸짓을 연결하고자 나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이렇게 소개하였다. 매일 새로 합류하는 이들의 이름이 발표되었고, 마침내 5월 8일에는 1,107명의 이름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경찰에 둘러쌓인 삼엄한 분위기에도 18명이 발언에 나섰고, 치열한 토론을 통해 참석자 만장일치로 “박근혜 퇴진투쟁”을 결정하였다.

 

세월호참사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첫 집단적 결정이 이루어진 후, 청와대 앞에서 유족들을 처음 맞이한 5월 9일은 참사 후 네 번째 금요일이다. 진도에 머물던 유족들이 서울로 이동하여 집단적인 투쟁을 시작한 날이기도 하다. 유족들은 박근혜 대통령과 만나려 청와대로 향하였고, 경찰 당국은 시민들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는 통행로를 겹겹이 차단하였다. 만민공동회를 마친 시민들은 유족들을 맞이하기 위해 삼삼오오 출발하였고, 그중 수십 명이 간신히 저지선을 넘어왔다. 경찰 장벽에 막혀 대통령을 만나지 못한 유족들은 청와대 앞 청운동 삼거리에 다 같이 주저앉았다.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사진을 꼭 쥔 채로…

 

청와대로 향하는 투쟁은 밤새 계속되어 다음 날 오후까지 이어졌다. 청와대의 응답은 ‘외면’이었고, 경찰력을 이용한 대응 방식은 유족과 시민들의 ‘격리’였다. 밀려난 시민들은 바리케이드 너머로 지치지 않는 응원의 마음을 전했고, 유족들의 분노는 저들이 두려워하는 집단적인 몸짓으로 바뀌어 갔다. 청와대 주변 집회는 전면 금지되었지만, 만민공동회는 굽힘 없이 계속되었다. 갈수록 탄압의 수위를 높이던 경찰은 6월 10일, 삼청동 쪽에서 청와대로 향하던 시민들을 폭력적으로 연행하였다. 9번째 금요일인 6월 13일에 영장실질심사가 열렸다. 검찰은 청와대로 향한 7번의 행동을 열거하며 구속 처벌이 마땅하다며 열변을 토한다. 증거자료는 주로 페이스북에 올라온 시민들의 응원 댓글이다. 세월호참사의 책임을 따지는 시민들의 시위는 금지하고 처벌해야 마땅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집단행동은 어떻게든 가두어버려야 한다는 것.

 

저들이 가두려 했던 것의 본체를 제대로 인식한 것은 석방된 후의 일이다. 9월의 어느 날, 카카오톡을 압수 수색했다는 통지서가 집에 도착했다. 5월 초부터 연행된 6월 10일까지 사용한 모든 카카오톡 내역을 압수해 조사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 대변인으로서 기자들과 정보를 나눈 언론소통방은 물론이고, 공권력 침탈이 임박한 밀양대책위의 회의방,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각종 투쟁대책기구의 내부 정보를 모조리 가져갔다. 덩달아 초등학교 동창방에서 대통령 욕하는 교사와 공무원 지인의 인적 정보도 넘어간 상황이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사자 참여는 고사하고 법적 필수절차조차 갖추지 못한 불법적 압수수색에 대해 사이버사찰로 규정하고, 인권단체와 함께 폭로 기자회견을 개최하였다.

 

이때는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 문제가 온라인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에 다음카카오 등 민간기업이 참여하던 시절이었다. 결국, 정권에 대한 분노가 확대되고, 수백만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사이버망명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에 개인적으로 세월호참사와 관련되었던 모든 투쟁은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총리공관 앞 연행 사건의 법적 근거가 되었던 집시법 11조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정을 받아내었고, 연행된 이들의 사건은 재심을 거쳐 무죄로 바뀌었다. 사이버사찰 책임자인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은 대법원에 장기 계류 중이어서 카톡을 쓰지 않고 여전히 혼자 텔레그램으로 망명 중이다.

 

저들은 많은 이들을 탄압하고 많은 것을 가두는 데 성공하였다. 더 크고 강한 것들이 풀려나 가둔 자들을 오히려 가두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눈물이 모두의 몸짓이 되어 세상 속으로 퍼져갈 때, 우리는 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저들이 금지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진실은 여전히 거기에 갇혀 있을 것이다.

 

유족들과 청와대 앞에서 함께 보낸 첫 금요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수많은 사진을 보며 무언가 눈물로 다짐하였지만, 520번의 금요일이라는 제목을 접하며 뒤늦게 깨닫는다. 10주기 기록이 어떤 결과물이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가족협의회로 모인 답은 ‘솔직한 기록’이라고 한다. 기억하고 투쟁하고 기록해온 모든 이들에게 정말 고맙다. 기억하겠다는 말이 또 다른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이자 스스로와의 단단한 약속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521번째, 522번째, 또 하나의 하루를 맞이하는 이들을 소중히 기억하련다. 아플수록 후회할수록 솔직히 기록하고, 더 많은 이들과 나누며 함께 살아나가자는 약속을 또 다른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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