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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3.

 

친한 형 S가 상수동 쓰리룸 유일한 밥통의 주인이었다. 그에게 연락한 것은 스물셋이 되던 해 2월이었다. 1월 말이 마감이던 방송사 드라마 공모전을 단념하고 몇 주가 지난 뒤였다.

아닌 게 아니라 드라마는 써 본 적도 없는 분야였다. 두 달씩이나 매달렸는데 대본을 반도 못 썼다. 한글 파일이 그래도 20페이지는 넘었다고 자위하다 보니 문득 오래 묵은 불안이 피어올랐다. 일 년 동안 매주 신촌을 쏘다니며 술로 지새우던 밤에는 안 보이던 열패감이었다.

 

4.

 

가망 없는 일에 별안간 집착한 까닭이 있다. 그로부터 두 달 전, 학교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내 창작극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두문불출하던 내가 멋진 작품을 내놓으며 학교로 돌아갈 기회였지만, 멋지게 엎어져 버렸다.

못 쓴 작품이었다. 주제가 뭐냐는 배우들의 물음에 중언부언한 기억이 난다. 그래도 반짝이는 대사들이 좀 있었다. 그게 허술한 플롯이나 회수되지 않는 복선 같은 치명적인 단점을 가려준 덕에 연습에는 돌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입시생들이 보러 오는 학교 방학 워크샵에 오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른 작품을 찾게 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과외 수업에서 퇴근하고 있을 때였다.

학교 사람들은 연출을 맡은 후배의 무책임이 이유라고 말해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왕 내가 쓴 것이니 내가 연출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좀처럼 없던 창작극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겠노라고 말하지 못했다. 자격지심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벗어난 지 너무 오래된 게 면구했기 때문이다. 내 딴엔 당연한 양보였는데 작품에 처음부터 의구심이 많았던 후배 입장은 떠맡은 셈이었을 거다. 우리 둘의 소통이 원활하지도 않았기에 파행은 예정된 것인지도 몰랐다. 방학에도 서울 이곳저곳으로 출근하던 나는 연습실에 잘 가지 못했고, 결국 전화로 통보를 들어야 했다.

조금은 억울하기도 했다. 다음 해 여름쯤을 생각하고 간단한 트리트먼트만 내밀었는데 갑자기 겨울방학에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망한 작품이었고, 그 망한 작품이 바로 내 것이었다. 결국은 신입생 여름의 일을 매조지지 못한 업이었다.

 

의욕에 넘쳐 활동하던 광고 동아리의 분위기도 내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광고가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조그만 공모전이라도 상을 받은 적이 없다. 그동안 얻은 건 팀원이 만들어 온 기획서를 그럴듯하게 프레젠테이션하는 능력, 그리고 디자인과 친구들 어깨너머로 배운, PPT를 예쁘게 만드는 잔기술쯤이었다.

학교에서 실패한 내 반골 기질이 불쑥불쑥 고개를 디미는 것도 문제였다. 세미나가 끝나도 밤 열 시까지 뒤풀이에 남으라는 규칙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규칙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OB들이 놀러 올 자리를 제공하고, 그들과 술을 마셔 주고, 그렇게 동아리와 연이 이어져가는 OB들이 인턴 채용을 주선해준다. 대외활동을 통해 큰 회사 인턴이라도 한 번 하면 본전 이상이다. 이게 곧 인프라이므로 동아리의 경쟁력과도 이어진다. 그런 식으로 연합 동아리가 돌아간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고 남는 신입생은 절반이 안 되었다. 나간 이들의 반절은 주말 알바를 사실상 할 수 없는 구조 때문에 돈이 궁해서, 반절은 세미나보다는 뒤풀이가 더 중요한 분위기 때문에 동아리를 탈퇴했다. 주객이 전도된 일이었다. 나는 거의 빼놓지 않고 새벽까지 뒤풀이에 남는 멤버였다. 그러면서도 격하게 수정을 요구했는데, 그때까지 남은 사람들은 그런 내 우격다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마음으로는 동의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도 느껴졌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운영진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태도가 바뀌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그해 개강을 할 때쯤이 되자 일자리도 끊어졌다. 친구의 동생이나 친구 동생의 친구 같은 인맥은 다 소진됐다. 학원은 풀타임 조교들을 구했고, 단발성 과외도 거의 없었다. 중개업체들에 연락을 돌려봤지만 영어나 수학이 아닌 다음에야 마땅한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통학에 하루 네 시간을, 동아리에 주말 전부를 소모하고 있었으니 구할 수 있는 다른 아르바이트도 없었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돈이 되는 것.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일을 진로로 삼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스물둘에서 스물셋으로 넘어갈 때, 하나라도 확신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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