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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2018년 여름 쓰리룸 골방에 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검진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오는 날이었다. 병원 일이 끝나면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었다. 나는 그날 새벽까지 혼자 강바람을 맞다가 하늘이 파래질 때쯤 돌아와 잠들었다. 그 여름에는 매일 그랬듯 그날 밤도 참 더웠고, 또한 상수동의 여느 날처럼 답답했던 것 같다.

깨어난 것은 아버지에게서 예닐곱 통의 부재중 전화가 오고 나서였다. 요금을 못 내 휴대폰 발신이 정지되어 있을 때였다. 다시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눈이 너무 뻑뻑했다. 인공눈물에 의존해 데일리 렌즈를 이틀씩 쓰고 있었다. 마침 렌즈가 다 떨어졌고 안경은 본가에 있었다. 십 분인가 더 기다리자 다시 전화가 왔다. 내가 상수동에 사는 건 (엄마를 얽은 서울 이사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이었고, 합정에 있는 친구 집에서 잤다고 했었다. 우리는 어찌어찌 만나서 중국집으로 갔다.

아버지와 나는 몇 달 만에 만난 것이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셨는데, 어쩌다 ‘가족 얘기’가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고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족’ 얘기란 우리 집에서 조금도 유쾌한 구석이 없으니 그날 대화도 유쾌할 수는 없었겠다.

세상에는 그런 가족도 있다. 소소한 근황을 나눌 수 있는 카톡방이 있고, 멀리 살아도 자주 통화하고, 싸웠다가도 누군가 화해할 수 있는 수단-이를테면 여행이나 외식-을 제시할 수 있는 가족이 말이다.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로 연결된 가족. 오랫동안 그런 가족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오랜 컴플렉스의 근원이라는 것을 깨달아오면서도 애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어디에서도 배출구를 찾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내 감정에 홀려 고량주를 아주 많이 마셨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실 아버지는 할 만큼 하셨다. 엄마에겐 아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사과를 원한 적도 일말의 죄책감을 안겨주려고 한 적도 없다. 다만 알아주셨으면 한다, 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님 앞에서까지 진심을 묵혀두고 있어야 한다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 더욱 슬플 거라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아버지가 그런 내 앞에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사과했다.

“사내라서 참아 넘기나보다 했는데 내상을 깊게 입었구나.”

상처를 주고받으며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아버지도 그 방법을 잘 모른다.

알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입은 상처가 무엇이라고 분명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상처를 입긴 했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비극 속에서 확실하게 상처 입은 편은 누나와 그녀의 어머니와 우리 엄마였지 나는 아니었던 거다. 다만 나는 그때 제대로 살고 있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에는 나를 무너뜨릴 버튼이 있었고, 무언가에 의해 눌리는 것을 안전장치가 남지 않았었다.

아버지와 나를 둘러싼 비극적인 상황은 자기연민으로 가득 찬 이 빌어먹을 컴플렉스가 발현하게 된 수많은 독립변수 중 하나였다. 그것이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놓을 수 있는 답이었다.

 

내가 딸이었다면 아버지를 변호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때로는 이것이 가부장적인 세상에서 남성이 지닌 원죄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솔직히, 정치적 올바름을 포기하는 대가로 세상에서 고립된 채 중국집 골방에서 아버지와 둘이서만 술을 먹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푸념하며 청도산 미나리를 함께 다듬고, 그들과 평화롭게 (따로따로) 사는 것만을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련다. 내가 오스카를 타고, 그럴 만큼 유명한 배우(든 뭐든)가 된다면 엄마에게는 모든 것을 줄 것이다. 하지만 트로피만은 아버지에게 드려야 한다. 사내가 가진 죄책감의 출처는 어머니이며, 인정욕의 궁극적 방향은 아버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불확실하다는 것만이 확실한 시대. 가족이라는 것은 이성의 영역도 감정의 영역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엄마, 아버지, 나. 이렇게 세 명을 뭉뚱그려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가족이며, 아버지와 나는 가족이다. 나는 이성적 가치판단을 하는 지식인이 아니다. 궤도에 오른 현실을 영위하는 사회인도 아니다. 둘 다로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 이전에 우리 엄마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 사실 때문에 지식인이나 사회인 노릇을 하는 게 방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일이다.

 

*

 

어느새 전역을 앞두고 있다. 각개전투를 하다 돌아오던 논산 논두렁에서 떠올린 것을 갈무리하는 데 대략 일 년 반이 걸렸다. 그동안 살이 쪽 빠졌다가 적당히 쪘고, 거창한 계획은 어중간하게 현실화되었고, A급 병사라던 일병 때 평판은 능글능글한 말년병장으로 바뀌었다. 입대 전과 별달리 달라진 것도 없다. 나는 임대주택을 수십 전형째 알아보고 있으며, 전역 후 가장 시급한 것은 아르바이트다.

그래도 후련하다.

이 소설, 같은 참회록, 같은 에세이, 같은 청춘르포를 읽다 보면 ‘물론’과 ‘그러나’가 엄청나게 많이 등장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좋은 대접을 받고 무엇이 보편으로 여겨지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며, 그렇게 된 곡절을 핑계와 궤변조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겁게 인정한다. 하지만 후련한 마음이다. 더 나이를 먹고 나면 주로 올려다보는 삶을 살지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그와 선을 긋는 것만으로 편안할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될 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다시 내가 이런 이야기를 써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쯤 생각하니 좀 더 잘 쓸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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