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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우리 집은 식구들끼리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 가풍이 그렇다. 정확히는 아버지와 나, 둘이서만 그렇다.

어지간한 집에선 믿지 못할 테니 예를 들겠다. 2018년 12월 11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양력 생신이자 공식 생신이었다. 할아버지는 1919년생이다. 그가 그해 100세네, 음력 생일은 그때가 아니므로 내년이 진짜 백 세가 맞네, 하는 논쟁이 그해 생신을 앞두고 치열했다. 옛날에 만연했던 음양력 혼용, 주민등록상 생일은 양력인가 음력인가 하는 혼란 속에서, ‘과연 할아버지의 실제 생일은 1919년 11월인가, 12월인가, 1920년 1월인가?’ 하는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난립했다. 쫓아가 보려다 단념했던 어른들의 토론 끝에 12월 11일이 기념일로 정해졌다. 공식 생신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날 나는 시골로 내려가면서도 내 생일을 축하받는 걸 기대하지 않았다. 역시 누구도 내 생일이란 사실을 몰랐다.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에서도, 시골집으로 옮긴 저녁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홀짝이다가 카톡과 인스타그램으로 오는 축하에 틈틈이 답장했을 뿐이다. 실은 조금 기대도 했다. 밥상에 갑자기 할아버지 몫이 아닌 케이크가 올라온 것이다. 알고 보니 생일이 2주 남은 작은아버지의 생일 케이크였다. 그럼 그렇지. 매년 이랬다.

이 글을 본다면 미안해들 하시겠지만, 우리 고모와 삼촌들은 정말 좋은 분들이다. 내 친구들처럼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의 생일 알림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분들이 아닐 뿐이다. 그냥 다들 모르신 거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분들 생신에 살갑게 전화라도 하지 않으니 내가 별로 서운할 것도 없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 생일을 모르고 지나치신 것 같지만, 알았어도 별말씀 없으셨을 것이다. 실은 나도 그의 생신에 무덤덤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주민등록상 생일은 8월 25일인데, 이날 챙겨드려야 하는지 지금도 혼란스럽다. 9월 언제쯤 케이크를 샀던 기억이 있는데 엄마 얘기는 또 다르고, 그렇다고 지금에나 와서 직접 생일을 여쭙기도 민망하고 그렇다. 대충 8월 무렵이 되면 나가서 고량주나 마시자고 할 따름이다. 민망하게 말하지 않고도 ‘생일 기념 비슷한 무언가’로 아버지가 이 제의를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아주 답답한 부자지간이다.

물론, 엄마가 매년 내 생일을 잊지 않는다. 나도 엄마의 생신을 꼭 챙긴다. 아버지의 생일상이 풍성했던 해도 더러 있긴 했다. 우리 ‘가족’이 거의 해체된 지 몇 년 된 지금은 그렇고, 어릴 때도 생일이 아주 대단한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때를 돌이켜보면 롯데리아나 무슨 ‘~랜드’ 같은 실내 놀이공원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때도 ‘뭐 이렇게까지 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짜 밥은 좋았다. 따지고 보면 남들과 조금 어긋나는 나의 취향, 나아가 공감 능력에는 내 탓만 있는 건 아닌 셈이다.

그보다 좀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에게서 청첩장이 왔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을 자주 찾고는 해서 나도 아저씨라 부르던 분이었다. 아드님이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수원으로 내려간 후 아저씨를 거의 만나지 못했고, 나도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뭐라고 할까, 신나셨던 것 같다. 명동에 있는 호텔로 가면서 옛날 명동성당 외벽 개수를 맡았던 이야기, 종각역의 계단이 옛날에는 어땠었다 하는 이야기 따위를 늘어놓았다. 원래는 옛날과 달라진 서울을 달가워하지 않는 양반이다. 식장에 도착했는데 아저씨는 없고 신랑과 사모님만 있었다. 아버지는 아드님과 악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식장 너머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안 사장은? 아버지가 물었다. 아저씨는 몇 달 전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동시 예식이었고, 조금 늦은 우리는 예식을 화면으로 봤다.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여섯 명짜리 테이블에 아버지와 나만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놓인 술을 다 마셨다. 그러자마자 일어났다. 결혼식의 어느 대목에서 우리가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종로로 나가서 술을 한잔 더 마셨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어떤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한숨 한 번 쉬지 않았다는 걸 선명히 기억할 수 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안 사장 아저씨 얘기를 다시는 하지 않았다.

좋은 일에 담담하면 나쁜 일에도 담담할 수 있다- 이것이 그동안 그가 견지한 삶의 자세였다.

 

그래서 즐기는 유전자가 없다, 아버지에게는 말이다. 술이나 좀 들어가면 모를까. 요즘의 세련된 부모들과는 달리, 부모님과 내가 공유하는 ‘추억’이란 별로 거창하지 않다. 마음먹고 놀 줄 아는 분들이 아니다. 어릴 때의 기억은 기껏해야 미지근한 당일치기 여행이나 사찰 탐방, 또는 나만 두 걸음쯤 앞서 신나다가 뒤떨어진 아버지나 엄마를 보고 걸음을 늦추던 것뿐이다. (이런 노잼 본능은 내가 충실하게 물려받았다. 나는 놀이공원을 즐기지 못한다. 여자친구와 스케이트장에서 데이트할 수 없다. 스케이트를 못 타니까. 카페, 식사, 영화와 연극 따위의 코스를 변용하다 보면 어느새 헤어져 있었다.)

아버지와의 어떤 추억은 -최소한 미소를 띠며 그릴 수 있는 옛날의 장면이라고 정의한다면- 어릴 때는 일상에 있다. 그의 갈색 무스탕에 묻혀서 겨울 아파트 단지 어디를 산책하거나, 새하얀 머리를 빗어넘기고 출근할 때 입을 맞춰주던 장면 따위가 네다섯 살쯤의 편린으로 남아있다. 그다음으로는 스무 살 너머로 건너뛴다. 마주 앉아 반주하는 시간들. 그의 용건에 따라 장소는 종로이기도 했고 서대문이나 서초동이기도 했고, 안주는 순대국, 깐풍기, 팔보채 등 다양한 듯하지만 잘 따져보면 그냥 동네마다 적당한 국밥집과 중국집을 찾아갔을 뿐이었다. 유쾌한 얘기로 우리의 비슷한 눈이 동시에 찢어지는 일이 아주 흔하지는 않았지만, 영 없는 것도 아니었다.

서울에서 그리할 때면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때쯤 헤어진다. 그 시간쯤에 술상을 물리자면 알딸딸하기보단 더하고 거나하다기엔 모자랐다.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잔에 반의반만 채우는 게 습관이 되었고, 반대로 내 것에는 잔 끝까지 가득 채운다. 소주병을 식탁 가장자리에 늘여놓으면 놓을수록 술을 ‘좀 했다는’ 기분이 난다. 왕년보단 훨씬 덜 마신 아버지도 그런 기분을 느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내가 그보다 더 취하는 건 확실하다. 늦은 시간 서울의 큰길은 어딜 가나 부산하여 묘한 동떨어짐을 느끼게 한다. 특히 취해있을 때라면 묘한 서러움이 밀려오기까지 한다. 피해의식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씹으며 걷는 게 즐겁기까지 하다. (가끔은 상해있는 속을 꺼내서 어루만져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기분으로 전철역이나 버스터미널을 향하는 아버지의 옆모습을 보면 유독 어떤 회한이 느껴진다. 우리의 눈매만큼이나 닮은 팔자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을 때, 고개를 반쯤 들고 두리번거리는 모습에서 요즘의 나를 발견하는 것은 물론이다. 가끔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투의 혼잣말도. 저 건물은 완전 파이로(잘못) 지어 놓은 거야, 아니 이게 언제 없어졌지, 여기는 길이 이리 복잡해졌냐… 유독 높은 건물이나 새로 난 길 앞에서 그런다. 그는 이방인이 되었고 너무 많은 것에 어리둥절하다. 여기 뭐가 있었어요? 그가 답하지 않으며 짓는 표정을 글로 담기가 어렵다. 아버지는 1961년 상경했고 2006년 서울에서 밀려났다. 아버지의 시절은 오래전에 지났고 서울에 남긴 유적도 말끔히 사라졌다. 술김인지 그리움인지, 오래도록 익힌 서울말에 묽어졌던 남해 사투리가 진해진다.

아버지의 담담함이 체득된 삶의 지혜인지, 그래서 모든 일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면에서 정을 맞듯 동그래진 강 하류의 매끄러운 자갈처럼 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물어보지 못했으니까. 전직 한국지리 선생으로서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겉으로 매끈한 둥근 자갈은 수많은 침식의 과정을 견뎌야 했던 상류의 날카로운 바위였다는 것뿐이다.

실은, 생일을 챙겨주지 않는 게 오랫동안 불만이었다. 시원스럽지 않아서, 남들 같지 않아서, 남들이 즐기는 것을 우리만 즐기지 못해서. 그건 즐거움을 자제하면서 나중에 있을 슬픈 일을 덤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슬프거나 나쁜 일을 겪고 난 다음에 알게 된 사실이다. 그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아버지 특유의 무심함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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