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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육아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이야기

매주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오로지 내 아이를 잘 기르겠다는 일념으로 부모라는 이름의 천차만별 ‘어른이들’이 모였다. 가족보다 멀고 이웃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공동체를 꾸려가며 겪는 좌충우돌 이야기들. 때로는 낯 뜨겁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용기 있고 어리숙한 내 안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는 곳. 지금 어른이들의 등원이 시작된다. 웰컴! 공동육아!

 

 


-우리가 가꾸는 터전

 

  • 청소 오리엔테이션

 

“청소는 자기 순번인 주말 편하실 때 아무 때나 하시면 돼요. 주말에 바쁘신 분들은 금요일에 미리 하거나 아예 밤늦게 하기도 하시더라고요.”

 

오늘은 신입 조합원에게 주말 청소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이다. 시설이사인 샘물이 신입들과 터전을 돌며 청소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청소 체크리스트 보시면서 천천히 하시면 될 거예요.”

 

A용지 한 바닥 9포인트 글자들로 빽빽한 체크리스트를 건네주며 샘물이 상냥하게 웃는다.

 

V 커튼 빨아오기

V 인형, 앞치마 장난감 빨아오기

V 양치컵 소독하기

V 화장실 하수구 뜨거운 물 붓기

V 책장 먼지 제거, 교구장 닦기

V 청소기 돌리고 먼지통 비우기

V 물걸레질, 일주일치 걸레 모두 빨아오기

V 터전 세탁기 돌리고 빨래 말리기

V 쓰레기통 비우고 물 세척

V 분리수거

V 화장실 청소, 변기 세척하기

V 현관 발매트 털기 및 앞마당 청소하기

V 신발장 청소

 

“이거…. 다 하는데 얼마나 걸려요?”

 

쭉 훑어보던 신입이 묻는다.

 

“글쎄요, 부부가 같이 바짝 하면 세 시간이면 될 거예요.”

 

다른 조합원들이 샘물의 대답을 그냥 지나칠리 없다.

 

“어휴~ 둘이 하면 그 정도지 혼자 하려면 한나절은 해야 해요~”

 

신입들의 얼굴이 더 굳기 전에 샘물은 서둘러 오리엔테이션을 종료한다.

 

“에휴, 막상 해보면 다~ 할 만해요~”

 

 

[그림 – 거북이]

 


  • 터전의 물리적 역사

 

내가 있던 공동육아는 십 년이 조금 넘은 아파트 단지에 노인정이나 도서관, 어린이집 같은 공간을 조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단독 공간을 빌려 사용하고 있다. 공동육아 중에는 조합원들이 뜻을 모아 영구 터전을 짓기도 한다지만 우리에겐 꿈같은 일이다. 공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지을 지 처음부터 그곳을 사용할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로또에 당첨되면 통 크게 영구 터전을 하나 짓겠어.” 거북이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우리처럼 보증금과 월세를 내고 공간을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거실 공간과 끄트머리에 딸린 작은 주방, 방 두 개에 각각 화장실이 있는 터전의 가장 좋은 점은 1층 단독 건물로 다른 아파트와 떨어져 있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손 볼 곳이 아주 아주 많다. 일단 겨울이면 한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얇은 벽을 두고 해마다 머리를 싸맨다.

 

“파티션을 세우거나 외풍 방지 시트지 같은 걸 붙이면 어떨까요?”

“파티션은 우리 예산으로는 어림없고, 시트지는 봄, 여름에 다시 떼어낼 수가 없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고민 끝에 새 박스를 여러 장 구입해 벽 사이즈에 맞게 오리고 붙여 일명 ‘박스 병풍’을 만들어 사용하기로 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착착 접어 두면 되니 간편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미관상의 문제는 작은 화가님들이 해결해 주었다. 병풍 가득 알록달록 물감을 묻힌 손도장을 찍어 칙칙한 박스가 화사해졌다. 키가 큰 아마들은 창문마다 뾱뾱이를 붙이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한다.

 

여름이면 터전 주변 모기들로 초 비상이 된다. 아이들이 모기에 몰리면 어른들과 다르게 심한 알레르기로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 며칠씩 고생을 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날을 잡아 모기약을 한 번 싸악 칠까요? 아니면 모기향을 곳곳에 좀 놔두면 어떨까요?

“모기약이 너무 독해서 걱정이에요. 모기향도 애들이 뛰놀다 걷어차거나 넘어질까 불안하고요.”

“전자 모기 살충기 같은 거 달아 놓는 건요?”

“꽃 한 송이를 따도 물어보고 따라고 가르치는데, 딱딱 소리 나며 벌레가 죽으면 너무 적나라한 거 아닐까요?”

 

주말 산책길에 민들레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야기하던 둘째가 생각났다.

 

‘꽃아 꽃아 나한테 한 송이만 다오.’

 

‘아,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깨버릴 순 없지.’ 모두들 수긍한다. 그렇게 여름이 되면 터전 주변에는 부적처럼 여러 가지 트랩들이 설치되곤 한다. 실에 묶여 흔들거리는 계피 조각들, 직접 제조한 EM 발효액이 담긴 크고 작은 사발들, 빗물 구멍 막이 테이프 등등.

 

 


열심히 쓸고 닦고,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만들고 붙이며 터전은 시간이 갈수록 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구색을 갖추어 갔다. 어느새 현관엔 <00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이라는 글자가 붙었고, 마당에는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투명 지붕이 생겨 날씨 제약 없이 더 많이 놀 수 있게 되었다. 개원잔치나 해보내기 같은 큰 행사가 있는 날이면 떡을 맞춰 제일 먼저 관리실 직원분들께 가져다 드린 덕에 앞마당 빈 잔디밭을 텃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텃밭 일 후 바로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입구 한편에 작은 수도꼭지도 달아 놓았다. 건축 회사에 다니는 조합원 찬스로 낡은 장판을 걷어내고 진분홍 새 장판도 깔고, 자꾸만 벗겨지는 나무 미닫이문은 사포질을 하고 시트지를 붙였다. 부엌에는 조합원들이 기증해주신 중고 냉장고, 트레이, 살균기까지 알뜰하게 들어차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 조합원들의 손 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차곡차곡 만들어진 공간들을 보며 낡고 반짝이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곤 했다.

 

“여기, 정말 멋진 장소네요.”

 

어느 신입 상담 때 인테리어 업을 하고 있다던 손님이 터전 안을 꼼꼼히 둘러보며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주인장 같은 넉넉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여기 저희들이 직접 가꾼 터전인걸요.”

 

[그림 –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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