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도원의 음악과 사회 디지털 시대에 음악은, 당신은 더 행복한가?

 

글 – 나도원(음악평론가, 노동당 경기도당 공동위원장)

 

 

벌써 18년 전이다. 경기도의 어느 도시에서 대중음악축제를 기획하고 제작할 때였다. 음악잡지 형식으로 만들기로 한 프로그램 책자에 음악인의 글과 그림을 실어보고자 펑크 밴드 럭스(Rux)를 이끄는 원종희에게 삽화를 부탁했다. 그는 ‘각 사람에게 알맞은 도구를 연결해봅시다’라는 제목으로 군인·외계인·회사원 등과 총·별·필기구 따위를 위아래에 나열해놓고 선으로 연결시켜보라는 그림을 보내왔다. 어린이 학습지에 나오는 ‘선긋기’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당시에 함께 일하던 스태프들처럼 머리를 갸웃거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해보고서야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좌우 맨 끝에 속옷 차림의 현대인 남성과 동물의 가죽옷을 입은 원시인 남성이 있었는데, 그 대항에 컴퓨터와 몽둥이가 각각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두 캐릭터가 옷차림만 다를 뿐 너저분한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부터 얼굴생김새와 자세까지 똑같았던 것이다.

 

 


 

디지털과 대중문화

 

 

냉전 시대의 기술 경쟁에 큰 빚을 진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생산해내고 있는 신기술과 신기기에 대한 기사와 글들은 대개 홍보물인지 분석물인지 분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어떤 태도를 반영한다. 2001년에 영화 <비독>을 시작으로(같은 해에 아이팟이 등장했고, 이제 애플과 펩시가 연계된 광고에도 익숙해졌다) 디지털 카메라가 장편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며, <스타워즈 에피소드 Ⅱ : 클론의 습격>(2002)은 본격적인 디지털 카메라의 역습이었다. 과거에 주로 밤이나 비 오는 날씨에 컴퓨터그래픽으로 괴수를 등장시킨 이유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 현란한 3D는 불법 영화 시장의 확장과 개인 감상 문화의 확산마저 돌파하는 수단도 되었고, 급기야 필름영화 카메라의 공급 중단까지 발표되었다. 이처럼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영화의 제작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지만, 제작구조 자체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한국의 영화계 종사자들 중 다수는 여전히 자신이 3D업종에서 일한다고 말한다.

 

기술의 발전을 추동하는 자본이 때론 그것을 억제하기도 한다. 어떤 기술발전이 다른 부문의 기술발전을 억제한다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IT업종 덕에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다지만 그 이상으로 기존의 일자리가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미래를 위한 기술이 미래를 빼앗는 경우는 많다. 아타리와 닌텐도 이후 나날이 성장한 컴퓨터 게임에선 고도로 진보한 기술이 스펙터클에 치중하며 살육과 전쟁을 내용으로 삼듯이 진부한 보수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상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도 재차 연구하는 단계에 왔는데, 사회구조의 문제가 결여되었다고까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대한 보도와 연구에서 창작자의 입장은 놀라울 정도로 자주 간과된다. 디지털 시장의 발전이 창조적 일자리를 늘리고 음악 산업의 선진화를 이루리라는 논평은 음악인들에겐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사수하겠노라는 이승만의 담화만큼만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하지만 아무도 바꾸지 못하고 있듯이, 디지털 음원시장의 확대가 창작자에게 별다른 수입원이 되지 않는 현실 문제를 반복하지 않아도 말이다.

 

 

이 맹점은 생활의 일부가 된 디지털 기반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대하여 환상을 갖는 이유와도 통한다. 트위터가 세상을 바꾸리라는 확신에 찬,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역설적으로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정작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계몽주의가 슬쩍 개입해 있었다. 무슨 현상-일시적으로 과도한 현상만 보이면 대중-자신은 포함시키지 않은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는, 그러지 못하여 안타깝다는 강박-모든 것을 정치의식으로 환원시키고 싶은 강박에 사로잡히는 자들이야말로 계몽의 대상이다.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말처럼 이상과 천상 혹은 이성과 대의를 상징하는 궁전이자 신전을 본뜬 민의의 전당에 있는 돔은 정치인들의 고성에 에코 효과를 더하는 용도로 더 자주 활용되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유저’들은 SNS를 정의와 예술과 철학보다 어제 먹은 화려한 빛깔의 파스타와 예쁘게 세팅된 샐러드를 보여주는 용도로 더 자주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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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시대에 정보의 차별은 ‘일단’ 없어졌다. 인터넷 시대에 예술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일단’ 많아졌다. 그래서 모두에게 ‘일단’ 기회는 열렸다. 그러나 배려 대신 배제가 강한 디지털 디바이드라고 하는 주변화는 물론이고, 변화를 거부하려는 자발적 배제도 겹쳐져 있다. 권력의 통제는 여전하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러나 모두가 생략하듯이, 무엇이 변했는가보다 어떻게 변하는가가 중요하다. 극비문서도 시한이 지나면 ‘구글’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는 시대라지만,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주체를 출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리란 기대는 믿음직하지 않다. 사이버 민주주의를 사이비 민주주의로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다만 마법은 없다는 것이다.

 

 

‘향유주체의 익명성과 민주성’, ‘소비문화를 향유하는 일상성’, ‘자본주의의 논리’, ‘외부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 ‘정보전달 매체의 다양성’, ‘정보전파의 신속성’. 이상은 「지방과 변두리의 대안 – 시시한 장소들의 약진」(신성희)이라는 글에 인용된 민속학자 김정하가 정리한 도시민속의 속성이다. 재미있게도 정보의 바다로 여행할 수 있다는 인터넷도 비슷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인터넷은 도시와 닮았고 부정적인 면까지 공유한다. 도심과 변두리, 재개발과 낙오지대, 명망가와 망명객마저 공유한다. 권력의 분산이니 새로운 가능성이니 네티즌의 등장과 같은 환상이 유포되지만, 화려한 도심을 헤매며 인파 속에서 외로워하듯이 주소와 링크를 헤매고 다니며 넘쳐나는 말과 누군가의 사진을 보면서도 자주 외로운 것마저 같다. 도시의 그 많은 사람들과 나는 완전히 무관하여 그 속에서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다.

 

 

사용자가 기기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의하여 결정되고 선택되고 있다. 인간이 디자인한 물건이 우리의 생활·습성·문화를 새로 규정하고 디자인해왔다. 장원과 소작농을 거쳐 공장과 컴퓨터 앞에 노예가 되어 앉아-걸어 다니고 있다. 자동응답기는 ‘미드’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더는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쏟아지고 업그레이드되는 새로운 기기들 중에서 사실 10분의 9는, 없어도 된다. 하지만 마치 누군가 흔들어 깨운 탓에 잠결에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와 몽롱한 눈빛으로 앉아 있는 모양새다. 등에 내비게이션과 최신식 태블릿 PC, 신작 영화가 다운로드 되는 스마트폰 등을 잔뜩 이고 산길을 오르는 당나귀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꼬리에는 ‘태그’가 붙어있을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선사한 찬란한 빛의 기적 덕분에 통제의 암흑시대가 된 오늘, 우리는 스머프로 금을 만드는 연구에 열중했던 연금술사 가가멜의 음습한 실험실에 입주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테드 카진스키(Ted Kaczynski)처럼 기술문명을 향해 폭탄 테러를 감행할 생각은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수학 천재도 아니고.

 

 

 

 


 

디지털 시대의 대중음악

 

 

큰 공연장에 가서 저 멀리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모습을 무대 옆의 대형 스크린으로 보고 있자면 ‘지금 뭐하고 있나’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런데 주위의 관객들은 더 적극적이다. 미래의 어느 날엔 공연이 펼쳐지는 현장과 자신의 얼굴 사이에 스마트폰을 가져다 놓고 녹화에 열중하는 광경에 그 누구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브에 집중하는 편이 나아 보이지만 현장에서 음악을 대면하는 것보다 거금을 내고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소비취향과 소비자본의 시대에는 자연스러운 관람 태도일지 모른다. 그런데 과거에 특별한 음악을 선곡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은 수동형의 행위가 아니라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요즘 스스로 유행곡들 모아 스마트폰으로 듣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주체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짧은 수명을 의도한 최신의 기기들처럼 주류 대중문화 소비재의 수명 역시 짧아지고 있다. 불과 몇 해 전, 자본주의가 하강 직전의 정점에서 쓴 오만한 회고록들이 지금 초라한 모습으로 출간되고 있다. 급진적인 사람에게는 이 시스템이 이미 선고를 받아놓고 법정에 들어가는 꼴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디지털과 인터넷도 자본의 식민지를 넓혀 놓았다는 소리만 할 생각은 없다.

 

 

이제 칼라TV에 잉크통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설과 추석 연휴가 와도 TV편성표에 색칠을 하거나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는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문화상품의 생산·유통·소비를 변화시켰고, 영화계도 마찬가지였으며, 3D의 스펙터클이 애니메이션마저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부분은 기술의 발전이 더 거창한 무엇으로만 향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방향이 공존한다. “단일한 혹은 단순한 디지털 미학은 있을 수 없을지라도 디지털 윤리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혹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는 숀 큐빗(Sean Cubitt)의 생각으로 굳이 타협을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음악마저 정보화하는 디지털 시대답게 오래된 음반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하고 모노에서 스테레오 사운드로 바꾸는 한편에는 바로 그 기술력으로 스테레오에서 모노로 다시 바꾼 음반이 나오고, 로파이(low-fi)와 날것의(raw) 소리를 의도하여 만드는 음악인들도 많아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공주>(1997)에 ‘튠세이더’가 사용된 목적은 재미있게도 전통의 수작업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애초에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일만 이천 봉을 모두 그릴 필요는 없었다.

 

 

더 중요한 변화는 테크놀로지의 대중화로 인하여 대중이 수신자 이상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특히 홈-레코딩이 가능해지자 적지 않은 베드룸 프로듀서들이 등장했다. 음악창작에서 이러한 기술적 조건은 소위 프로슈머와는 다른 차원에서 말할 수 있고, 《타임Time》이 2006년의 인물을 선정한다며 표지에 거울을 박아놓은 것처럼 누구나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최소한 시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순히 진입장벽이 낮아졌다고 정리해선 곤란하다.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젊은 대중음악평론가들 중 다수가 PC통신 등 인터넷의 등장에 신세를 졌는데, 이전보다 진입장벽이 낮아 보일 수는 있으나 실제로는 ‘고단한 검증’을 거친 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음악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기법도 다양해졌다. 노트북 컴퓨터 한 대를 이용한 음악작업은 물론 공연조차 일반화되었고, 스크래칭(scratching)과 브레이크(brake)와 같은 훼손도 보편의 음악기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갖가지 소음을 채집하여 컴퓨터에 정보로 담아두었다가 음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농기구인 낫이 농민군에게는 무기가 되고, 특이한 취향을 가진 이의 장식품도 될 수 있는 것처럼 거의 모든 종류의 소리가 음악이 되고 있다. 그러한 노이즈 음악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들었다면 자신의 변기를 업그레이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기괴하게 보이기 마련이고, 예술적 진보는 파괴처럼 보이며, 가장 진보적인 음악은 가장 늦게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위음악이라 해서 반감성적이진 않다. 전위적이면서 서정적인 음악을 마니아라면 많이 알고 있다. 자본시장에서 곧잘 이탈해버리는 이러한 테크놀로지 기반의 실험이 자본력에서 뒤쳐진 인디음악을 통하여 본격화된 것이다.

 

 


 

후진성에 의한 선진성

 

첨단의 기술을 배우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생존한다는 강박이 모두의 가슴 위에 올라가 숨통을 누르고 있다. 학력별 직업선택의 폭과 직업 소득격차가 현실인 사회에서 자신을 상품으로 내다파는 요령을 익혀 유능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아무리 유능하고 용감한 지네닭도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있지만, 순수와 꿈을 들추려는 감성 따위는 물품보관함에 맡겨둬야 한다고 스스로 가르쳐야 한다. 부식물에 집착한다. 아니, 본체를 뒤덮어버린 부식물에 지배받고 있다. 비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돈더미 위에 눕고 있으니 얼마나 푹신푹신할까. 자신의 (소비)욕구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지만,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안부를 묻는 만남의 장이었던 시장에는 오늘도 물건을 태운 카트의 운전자들이 무심히 주행한다. 이럴수록 재개발현장에서 당장 구조해 와야 할 것이 있다.

과거를 낭만화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문제의 해결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낭만으로 승격되기 힘든 과거의 미해결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유사 이래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음악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지나쳐온 뒷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앞서 부정적인 어조로 말해온 여러 사안이 여기에서 반전을 일으킨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음악인들이 대규모로 연대했다. 재개발 공사현장의 섬이었던 ‘두리반’에서 ‘뉴타운컬쳐파티’가 펼쳐졌다. ‘명동 마리’에는 젊은 음악인들이 모여들었고,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작은 클럽을 살리기 위해 ‘바다비 네버다이’라는 연대 페스티벌이 열렸으며, 4대강 사업 때문에 위기에 놓인 유기농 농민들을 위하여 ‘두물머리 강변가요제’가 열렸다. 젊은 노이즈 음악가이자 공연기획자인 박다함과 ‘불길한 저음’은 시장 상인들 속으로 들어가 ‘인천 배다리 문화축전’에서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첨단의 테크놀로지와 돈벌이가 무엇보다 강조되는 시대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이, 첨단의 테크놀로지와 돈벌이가 제일 중요하다는 시대이기에 벌어졌다. 내면의 후진성이야말로 진정한 진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앞서면 뒤쳐져 보이기 마련이며, 자발적 퇴보는 전진하는 퇴보이다. 시대에 뒤쳐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854년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자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말했던 “낡은 옷을 입은 새로운 인간”이 “새 옷을 입었어도 새로운 인간의 음악”으로 나타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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