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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4] ‘첫 아침’

된소리 하나 없는, ‘눈보라’라는 말은 참 예쁘다. 낱말만 놓고는 휘몰아치는 눈이나 살을 에는 바람이 도저히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기구한 운명처럼 변화무쌍한 사계를 타고난 한반도였다. 그럼에도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 선조들은 날씨에 부드럽고 예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일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측건대, 그것은 남도의 어디쯤에 누워 북방의 설경을 상상하며 지은 게 아닐까. 연해주의 겨울폭풍을 겪어본 이라면, 부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를 치는, 더없이 거칠고 투박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체크아웃을 하고 호텔을 나왔을 때 마주한 것은 여전히 휘몰아치던, 예의 눈보라라는 이름으로는 그 생생함을 전할 수 없는 블리자드였다. 춥기도 추웠거니와, 시야가 이십 미터도 안 됐다. 캐리어를 끌고 밀면서 앞으로 나가던 그 아침이, 여행을 잠깐이라도 후회했던 유일한 순간이다. 싱가폴이나 갈 걸.

숙소에서 언덕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길이에 비해 파란 불이 턱없이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시베리아 철도의 동쪽 종착역, 블라디보스톡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뒤로 바다를 끼고 있을 텐데,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횡단여행은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바지 밑단이 다 젖은 채.

역 앞을 가로지르는 큰 길에 한국어가 쓰인 중고 버스가 이따금씩 지나갔다. 그 대로를 뒤로 작은 광장을 지나 대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야 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흰색 아치 모양의 앞면이 캐노피가 되고, 입구는 몇 걸음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콧물을 훔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을 수 있는 막간이 생겼다. 그것이, 을씨년스러웠던 도시의 첫인상을 조금 풀어주었으리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포근한 그늘이 될 것이다.


러시아의 기차역과 공항은 서울역이나 인천공항 같지 않다. 드나들기가 좀 성가시기 때문이다. 입구와 출구가 따로 정해져 있다. 출구는 밖에서 열 수가 없고, 입구에서부터 가방이며 몸을 수색한다. 들어갈 때마다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아무리 작은 역, 작은 공항이라도 그랬다. 테러 위협이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하긴 러시아라는 나라가 주변국에 좀 우격다짐이어야지.

외투를 벗었다 입고, 금속 탐지기에 걸리는 동전을 주머니에서 빼 보여주는 일을 네 명이서 차례로 한 다음에야 실내를 제대로 구경할 수 있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올려다볼 수 있는 천장에는 구소련 시절 만들었음직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거대한 크렘린을 중심으로 도시를 병풍처럼 늘어놓고, 그 앞에 행복한 모습의 사람들을 작게 그려놓았다. 정말 작아서, 얼핏 보면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인민의 나라에서 인민의 크기는 얼마였는가.

일흔여섯 시간을 오롯이 기차 안에서 보내야 했다. 사람은 넷인데, 넉넉잡아 아홉 끼를 때우려면 장을 크게 봐야 했다. 역 앞에는 대형마트가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그것같이 유리로 둘러싸인 정사면체가 돌출된 입구 파사드에 얹혀 있다. 그 마트가 식량의 거의 유일한 공급처였다. 주식은 거의 컵라면이었다. 신라면이나 진라면도 있었는데, 보통 라면보다 세 배는 비쌌다. 조금 사서 매일 저녁 나눠먹기로 했다. 그 밖에 양치질이 귀찮을 때 커피와 홍차 티백이 입을 헹궈줄 예정이었다.

문제는 물이었다. 유럽에는 정수기가 드물다. 끓인 물을 먹거나 생수를 사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생수 같이 생긴 게 알고 보면 거의 탄산수다. 언젠가 봐 두었던 팁은 이랬다. 이름 앞에 ‘HE(아니오)’가 붙어 있으면 ‘탄산수가 아니다’라는 뜻이니 생수란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마트에 그런 표시가 붙은 물병이 없었다. 출발 시간은 다가오고 무언가 고르긴 골라야 했는데, 숱한 제품들 사이에 갓난아기 얼굴이 그려진 걸 샀다. 설마 애들한테 탄산수를 먹이진 않을 거야. 그렇게 과감하게 샀던 여섯 병은 다행히 생수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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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모스크바행 기차표]

‘띠낏(티켓)’을 바꾸고, 기차를 놓칠까 여러 번 플랫폼 쪽을 쳐다보고 나서야 탑승한 ‘러시아(Россия) 호’. 러시아 철도의 상징과도 같다는, 하루에 한 편 있는 모스크바행 001편답게 내부는 매우 깔끔했다.

캐리어를 의자 밑에 우겨넣고, 의자를 침대로 개조한다. 멀티탭을 꽂아 휴대폰을 충전하고 테이블 한 쪽에 차와 커피를 놓는다. 베개를 꺼낸 공간을 족히 스물다섯 개가 넘는 라면과 생수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를 세상의 동쪽 끝을 창밖으로 내다본다. 그러다 보면 기차가 움직인다.

여전히 눈이 날리는 밖을 바라보다,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내 그 아쉬움을 잠깐 미뤄둘 수 있을 만큼 넓은 설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이층침대의 아래 칸에 걸터앉은 채 휴대폰을, 책을, 창 너머 지평선을 번갈아 본다. 그러다 문득, 한 평은 되는지 모를 이등석 객차 안을 새삼 둘러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고작 여행 이틀 째, 새파란 초심자의 마음이 조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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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리고 진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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