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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5] 침대칸

익숙한 노래에서 생소한 음(音)을 느낄 때가 있다. 보컬이 전하는 가사를 따라가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 어떤 음악이든 목소리의 배경에는 필경 짤랑거리는 기타의 마찰음이 있기 마련이다. 귀에 익은 후렴구 뒤에서 들려오는 리프를 어떤 동기도 없이 발견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 것은 마음먹고 찾으려면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을 돌아보는 것도 그렇다. 어디 가서 무얼 구경했다는 ‘큰 조각’들이야 익숙하다. 하지만 길을 걷거나 버스 창가에 앉았을 때 문득 스치는 편린이 있다. 비 오는 날 파리에서 여러 병을 샀던 ‘블랑’ 맥주의 가격, 빨래를 한다고 가루비누를 샀던 가게, 혼자 숙소로 돌아올 때 들었던 노래, KFC에서 친절을 베풀었던 아주머니의 얼굴, 베를린 브레히트 극장 앞에서 보았던 <사천의 선인>의 포스터 사진… 글을 쓰자고 앉으면 기억나지 않는 것들. 이런 뜻밖의 발견에 소박하게 즐거워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긴 여행이 준 선물일 것이다.


일월, 지리 교과서에서 이르는 최한월(最寒月)이다. 열차는 연해(沿海)에서 벗어나 중국과 몽골 국경과 평행하게 달렸다. 바깥은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시선을 둘 곳이 어디든 지나치게 가까운 한 평의 침대칸에서, 다행히도 성에가 끼지 않았던, 집게손가락 사이의 공간 정도가 비스듬히 열리는 창문으로 일월의 대륙에 마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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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기차 안에서 바라본 일월의 대륙]

그것은 창밖으로 잎이 좁은 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 가운데 설원이 말 그대로, ‘펼쳐진’ 모습이다. 가끔 굴뚝을 낀 인가가 모여 있다. 멀리 보이는, 백이면 백 털모자를 쓴 사람들이 뿜는 입김이 그 굴뚝 연기처럼 진하다. 외양간도 축사도 없는데 어디서 먹을 걸 가져오는지 모른다. 플랫폼이 둘 뿐인 외딴 정거장에서 먹을거리를 내다 팔던 사람들이 그들 중 하나였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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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큰 역에 가까워지면 하나밖에 없던 철로가 갑자기 서너 개가 된다. 속도가 줄기 시작하면 딱딱한 노어로 안내방송이 나온다. 녹음된 목소리일까, 아니면 차장 아줌마의 목소리일까.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열댓 번은 들었으니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열차 안에서 할 수 있었던 것 거의가 이 모든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응시하고 또 겪는 것이었다. 좋았다.

객실은 답답하고 더운 편이다. 창문으로 바람을 쐬면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차장 아주머니가 지나가다 닫으라고 하기 때문이다. 외인(外人)이 듣는 러시아 말의 특성상 이게 좋게 말하는 건지 다그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일단은 고분고분해야 한다. 복도 쪽 문을 닫아 놓고 창문을 열어도 금방 차장이 와서 허리춤에 손을 얹는다. 나중에 보니 낮에 창문을 열면 물이 떨어지고, 그게 얼어 버렸다.

그래서 온통 기다린 건 바깥바람 쐬기였다. 특히 숙면이 쉽지 않은 새벽에 그랬다. 씻지 못한 찝찝함은 저온에 좀 덜해진다. 열차의 복도에는 시간표가 붙어 있다. 역 사이에는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정도가 걸린다. 규모가 큰 역에서는 열차가 짧게는 15분, 길게는 30분 정도 정차하는데, 이 시간이 다 적혀 있다.

          미닛(30분)?

          다(맞아요), 다!

처음 ‘외출’한 곳은 출발 열두 시간이 지나 정차한 하바로프스크였다. 밤이었다. 바람도 쐬고 좋긴 한데, 왠지 놀다가 돌아와 보면 기차가 없어져있을 것 같았다. 차장에게 몇 번을 물은 뒤에야 안심하고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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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 지도, 러시아 극동쪽에 위치한 하바롭스크]

내릴 때의 내 옷차림은 놀랍게도 반바지였다. 시베리아의 추위라는 것이 묘하게 허세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처음 밖에 나왔을 때는 얼마나 추운지 실감이 잘 안 나기도 한다. 별로 안 춥네, 하고 돌아다니다 잠깐 바람이라도 불면 질겁하고 선로를 가로질러 기차로 황급히 돌아가야 했다. 나 뿐만 아니라 주로 얇은 추리닝으로 바람을 맞았던 일행 모두가 삼일동안 돌아가면서 감기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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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쐬기라는 것이 별 건 없다. 어떤 역에서건 나는 공금을 꺼내 콜라 한 병쯤 사오고, 나머지는 담배를 피우는 게 전부였다. 시간이 조금 지났다 싶으면 깡 없는 우리는 문 앞에 바짝 서 있었다. 그러다 보면 밤의 보라색 공기 사이로 반짝이는 뭔가가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눈은 아닌데, 수증기가 얼어서 그리 된 것 같았다. 코로 숨을 쉬면 코털이 얼어붙는 게 느껴진다.

기차가 늦어지면 가끔 시간표와 달리 운행하기도 한다. 예정보다 짧게 정차하는 것이다. 한번은 이십 분 정차하는 역에 내려 구멍가게를 갔다. 빵과 콜라를 샀는데, 둘이 뭔가를 더 사오겠단다. 나와 한 명은 기차로 일찍 돌아왔다. 그런데 우리 둘이 들어와 얼마 안 있어 덜컹, 하는 소리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다른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객차로 돌아온 녀석(이름은 ‘진수’)은 우리 넷 중 눈이 제일 컸다. 녀석의 그 큰 눈을 마주치자 사태가 실감났다. 큰일 났구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복도에 있는 차장에게 매달렸다. 연신 ‘플리즈…’라며 손발을 다 썼지만 기차는 이미 출발해버렸다. 차장의 반응도 매섭긴 마찬가지였다. 말을 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표정과 말투는 대략, ‘너네가 정신없이 노느라 기차에 못 탄 것 아니냐?’. 말도 안 통하고 할 말도 없었다. 우리는 힘없이 침대에 다시 앉아야 했다.

         휴대폰도 여권도 두고 갔는데 어떡하지,

         다음 역이 500km은 떨어져 있을 텐데,

         공금은 갖고 나갔지?

이러고 있는데, 두 친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타났다. 기차가 일찍 출발한다고 해서 한참 앞쪽의 칸에 부랴부랴 탔단다. 그제야 웃으며 서로 온갖 욕을 하고 있었더니, 아까의 차장 아줌마가 와서 씩 웃는다. 우리도 헤헤, 스파시바(감사합니다), 스파시바. ‘미안합니다’를 알았다면 그걸 말했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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