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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나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1를 좋아한 적이 있다.

1 줄여서 ‘맨유’. 영국 최고의 명문 축구 클럽이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다 우승팀. 한국에서는 박지성의 입단으로 가히 국민 구단 수준의 인기를 누렸다.

한때는 그랬다. 누구보다 평범한 외모의 박지성이 누구보다 거대한 명문 팀에 입성한 바로 그 시기였다. 2005년이었다. 12월생인 내가 다른 애들보다 몇 달은 족히 모자란 열 살이었을 때다.

나는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자유롭게 타지 못했다. 박복하게 타고난 운동신경이었다. 공들여 자전거를 배우는 것보다는 보조 바퀴에 의지하는 게 훨씬 편했다. 매한가지로 스케이트 연습도 싫었다. 헬멧에 팔꿈치와 무릎 보호대를 다 차고도 정작 엉덩방아를 찧어 맨살이나 다쳐오는 건 유쾌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는 거의 모두가 좋아하던 동방신기와 슈퍼주니어를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남자애들은 그들을 좋아한다는 걸 부끄러워했지만, 지금 와서는 사실 동경했었음을 고백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 ‘거의’에 속하지 않는 아이들이라도 SG워너비쯤은 좋아했는데, 나는 소몰이 창법을 싫어했다. 방과 후 PC방에 몰려가 스타크래프트나 카트라이더를 하지도 않았으며, <유희왕> 카드놀이도 내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대신 냉장고에서 주전부리를 찾아내 해치우거나, 방구석에 엎드려 책을 읽거나, TV 앞에 앉아 <X맨>의 박명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유재석이나 강호동도 물론 좋아했지만 내 ‘최애’는 박명수였다.

열 살이란, 취향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나이다. 내가 이런 아들의 부모였다면 향후 수십 년의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우려했을 것이다. 애정이 결핍되어 있고, 취향을 부정당하면 쉽게 흥분하며, 여자애들과 변변하게 사귀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 지극히 당연한 근심이다. 학교에 들어선 아들내미는 친구들이 낯선 아파트단지로 자전거 탐험을 떠날 때 함께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남자애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따돌림을 당하거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난 맨유의 주전 멤버 명단을 모조리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를 사랑하던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같았다. 방송사는 이 명문 팀에 대한 특집 방송을 연일 ‘때렸고’, 인터넷 스포츠뉴스는 이 낯선 팀 선수들의 신변잡기 소식으로 도배되었다. 맨유라는 클럽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쏟아졌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들이었다. 1950년대(1950년대!) 성공을 이끌었던 맷 버스비 감독이란 누구인가, 영국 최장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라커룸에서 시전한다는 ‘헤어드라이어’2 리더십의 비결, ‘캄프 누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99년 트레블3, 박지성의 옛 동료이자 도우미인 골잡이 ‘반 니스텔루이’, 개인플레이만 일삼아 얄미운 ‘호날두가 타는 벤틀리… 우리는 네이버 스포츠뉴스와 지상파 3사의 특집방송이 일러주는 대로 학습했다.

2 전반전에 부진한 선수 얼굴 앞에 대고 고래고래 호통을 친다고 해서 이름이 이렇다.

3 보통 자국 정규리그 우승, 축구협회컵 우승,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한 시즌에 모두 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9년 맨유는 유럽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0-1로 뒤지던 후반 2골을 내리 득점해 기적적인 우승을 거둬 트레블을 달성했다.

그랬다. 정말이지 모두가 우리 동네 팀 수원의 선수 이름은 하나도 몰랐다. 아니, 담임 선생님 이름도 헛갈리는 아이들이 더러 있을 때였다. 그러면서도 지구 반대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거라면 무엇이든 알았고, 좋아했다. 우리는 짝퉁 유니폼을 맞춰 축구팀을 결성했고, 막 서비스를 시작하던 ‘피파온라인’ 게임에서 누구나 맨유를 골랐다. 가끔 호나우지뉴의 바르셀로나나 베컴의 레알 마드리드를 고르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그건 모두 맨유가 잉글랜드 최강팀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지성의 존재만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인기는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맨유는 2006-07시즌부터 2008-09시즌까지 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유럽 챔피언스리그도 두 차례나 우승했다. 그 시절 우리는 온몸으로 느꼈다. 맨유의 팬이 되는 건 이런 뜻이었다. 주말 밤 경기가 끝나면 웃으며 잠들 수 있고, 매년 오월마다 우승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는 것! 팀이 승승가도를 달리는 동안 나 역시 맨유라는 팀을 좋아했다.

여전히 친구들과 자전거를 함께 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경기를 본 다음 날 학교에서 박지성의 다이빙 헤딩 골에 관한 얘기를 나눌 수는 있었다. 어떻게 이런 팀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그로부터 삼 년 전, 나는 일곱 살이었고, 주민등록등본이란 물건을 처음 보았다. 익숙한 엄마 이름 옆에는 낯설게도 <동거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버지 이름엔 ‘본인’, 나는 ‘자녀’. 동거인이란 그 세 글자는 너무 뜻밖에 만난 낱말이어서, 부자(父子)로 이루어진 가구에 부대끼는 어떤 작은 티끌처럼 느껴졌다. 세발자전거에서 보조 바퀴 달린 자전거로 마지못해 갈아탄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이야기다.

어릴 적에도 의심은 많았다. 나는 어른스럽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겼고, 항상 순진하기를 거부하는 아이였으니까. (부모님은 이 사실을 잘 모르신 것 같다. 두 분 모두 내가 등본이나 초본을 들여다보는 걸 말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히 내 당연한 인식에 어긋나는 명확한 증거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나는 일곱 살 어린애이기도 했다. 단란하고 보편적이고 정상적인 가족, 그 개념 바깥의 무엇을 어떻게 상상했겠는가. 그리고 보조 바퀴가 달린 가짜 두발자전거를 타느라 그 재미없는 종이짝은 금방 잊어버렸다. 바큇살에 구슬이 꿰어져서, 페달을 밟을 때마다 따다다다 하는 소리가 났다. 넘어질 이유도, 배울 필요도 없는 기특한 물건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명절이었다. 시골집은 경상북도 끝자락 영주였다. 할아버지가 삼십 년째 사과밭을 일궈온 곳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내 아버지를 “OO 애비”로, 친정에 들른 고모들은 “OO 아빠”로 불렀다. 내 이름은 ‘OO’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걸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 사실과 <동거인>을 관련지어 생각할 만큼 성숙하진 않았다. 엄마는 명절마다 우리 부자와 같이 영주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나는 그 사실과도 <동거인>을 연관 짓지 못했었다. 어쩐지 그해 추석따라 ‘OO’의 정체가 궁금했을 뿐이다.

영주에 내려가면 대개 할머니는 안방에, 할아버지는 거실 ‘페치카(벽난로)’ 앞에 앉아 계셨다. 사랑방 문지방을 넘는 것은 망설여지는 일이었다. 대신 마루의 흔들의자에 다가가는 게 훨씬 쉬웠다. 그게 상징이라도 된다는 듯이 할머니보단 할아버지가 좀 더 따뜻하셨다. 할머니도 좋은 분이었지만, 당신 타고난 기질이 칭찬보다는 타박에 좀 더 능하셨던 것 같다.

내가 잔소리를 듣고 나면 할아버지는 내게 뭔가를 쥐어주시며 웃었다. 사탕이든 젤리든 아니면 연 날릴 때 쓰는 실패든. 그럼 나도 웃었다. 할아버지는 늦둥이 장손인 나를 귀여워했고, 할머니는 그리하여 손주 버릇이 나빠지는 걸 염려하시는 것처럼 굴었다.

훨씬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늦게라도 아버지가 아들을 얻는 걸 반대하셨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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