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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심심하면 받던 얼차려는 아주 고역이었다. 내 체력은 아주 저질이었기 때문이다. 동기 서른 명 가운데 제일 무거운 몸무게와 그 무게에 매달려 가장 낮게 가라앉은 폐활량을 가졌었다. 어깨동무한 채 백 개에 한 세트씩 앉았다 일어났다는 거듭하다 보면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두 세트, 그러니까 이백 개쯤을 하면 남자들은 여자들 사이사이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보통 여자들이 힘에 겨워 하니 남자들이 받쳐주면서 나머지 이삼백 개쯤을 하라는 건데, 어째 나는 반대였다. 여자 친구들이 내 토르소를 전부 지탱하는 꼴이 되어서 정말 미안했었다. 많이 물렁하고 무거웠지, 친구들. 몸도 불편하고 마음도 불편한 일. 그럴 때면 차라리 체벌을 받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렇다면 마음만은 편했을 텐데. (그런데 우리가 ‘맞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영악했다. 그때만 해도 야구 배트 같은 둔기로 볼기나 허리를 맞지 않았다면 폭력이 아니라는 생각이 남아 있을 때였다. “선배들이 너희를 때렸니?”라는 교수님의 말에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예술대학은 우리 캠퍼스의 가장 그늘진 구석에 있었다. 도덕이라는 잣대로 판단하면, 그리고 그 잣대가 객관과 이성으로 만들어진 거라면, 거기서 무람없이 내려오던 관습은 의심할 것도 없이 나쁘고 부도덕한 것이었다.

봄 내내 우리는 연습실의 엄혹한 공기와 권위적인 고학번들을 성토했다. 공강 시간에 모여든 학교 앞 카페나, 대학로를 피해 강남 같은 동네로 회식을 간 자리에서였다. 나는 그 중심에서 불같이 울분을 토해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매일 청소를 시키거나 매주 금요일에 기합을 주거나 선배들의 촬영장에 차출해서는 안 되었다. 그 자명한 사실을 가지고 고등학교 일학년 남자애들에게 그랬듯 열을 올렸던 것이다.

나는 그때 블랙 코미디를 하겠다는 말을 항상 주워섬기고 다녔었다. 그 캐릭터에 충실하려고 했는지 특별히 무서웠던 선배들을 시니컬한 농담으로 까대고는 했다. ‘다나까’ 말투를 시키고, 청소 상태를 검열한 뒤 다시 먼지를 닦이는 품이 특히 날카로웠던 선배들. 그들을 빈정거리는 웃긴 성대모사나 욕설은, 내가 그다음으로 이어나갈 철학개론과 역사학개론 레퍼토리의 두서없음과 지나친 날카로움을 상쇄해 주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어. 칸트가 연습실에서 우리를 봤다면 엄한 정언 명령을 내렸을 거야.”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기마자세를 시키거나 누구를 패서 연극하는 거 봤냐. 이게 다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온 군대식 관습이라고.”

어휴. 적어놓고 보니 이런 말을 쏟아내는 사람이랑은 좀 떨어져서 걷고 싶었을 것 같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와 어릴 때 읽어놓은 사회과학서 몇 권이 그때까지도 내가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수사와 권위였던 게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동기들과 끈끈해지고 대학로를 이끌어갈 예비 예술인으로서 중심을 잡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심지어 불의(不義)는 그들이요 우리가 정의라면, 선배들 몇과 불화해 봐야 아쉬울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런 문화가 만연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긴장과 공포 속에 신입생들을 쥐어 잡는 것은 꼭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누구도 가난한 선배들 단편영화의 스태프가 되거나 연습실과 스튜디오에서 걸레질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온 대학생들에게 내일 새벽 여섯 시 콜 타임에 나와서 온종일 무보수로 붐 마이크를 들라거나 매일 연습실 거울을 박박 닦으라고 ‘설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들은 그럴 의무가 없다. 신입생에 기꺼워함에만 의존할 수는 없고, 그들이 무상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이 집단은 돌아가지 않을 것이었다. 무서움으로 일학년들을 추동하는 일이 가장 편하고, 쉽고, 합리적이었다. (물론 집이 부유한 선배들이 우리에게 교통비 만 원이라도 찔러준 적은 없었으며, 여러 악습이 소멸한 지금 학교는 잘만 굴러간다.)

선배들만의 잘못이 아니기도 했다. 과 사무실 구석에는 오래된 야구 배트가 있었는데,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왕성히 선배들을 조져놓던 물건이었다. “그 빠따는 예전에 OOO 교수님이 몇 기부터 몇 기까지 엎드리게 해 놓고 직접…” 신입생 때 조교가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군기란 이 좁은 세계에서 오랫동안 이어지던 전통이었다. 우리에게 직접 지시한 건 선배들이었지만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건 교수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으레 있는 일이었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한두 살 많거나, 학교에 늦게 들어온 형보다는 두세 살이 어리기도 했던 선배들의 잘못이라면 이 모든것을 묵묵히 수용만 했거나 적당히 조금씩만 악습을 걸러내려던 것이었다. 학번이 가까운 선배들 가운데는 전전긍긍한 이들도 많았다. 우리와 고학번 사이에서 최대한 ‘얼차려 시간’을 없애보려던 것이다. 그래 봐야 그들은 방조자이고 시간이 지나 나에게 노예근성이 앉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아마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고.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다. 세상에는 다른 잣대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이나 ‘적응력’ ‘붙임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관념론으로 연습실의 공기를 읽을 때, 예술고등학교나 작은 극단을 거쳐 온 동기들은 이 세계가 그렇게만 굴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신나서 선배들을 까댈 때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예술만 해 오던 그들보다 조금 더 ‘안다’는 것. 혜화역의 새벽공기를 맡으며 품었던 예술대학생이란 자긍심에는 그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실 내가 딜레탕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대학 입학 이후 증명돼 왔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영화와 연극, 연기와 연출 자체를 사랑했다. 영화 하나를 수십 번씩 수백 편을 봐서 누벨바그나 타란티노니 스콜세지니 하는 감독들의 영화쯤은 모두 꿰뚫은 친구들, 늦은 나이에 연기의 길을 결심해 더는 도망갈 곳이 없었던 형과 누나들. 커튼콜 순간의 갈채를 안을 수만 있다면 지금의 고통이야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보다 진정성도 노력도 덜했다. 그때 내가 붙들어야 했던 것은 농담이라는 조그만 재능과 얄팍한 사회과학 지식 몇 줄이었다.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태연할 수 있었다. ‘칸트’, ‘현대사’, ‘군기의 기원’부터 ‘올바름’과 ‘정의’같은 개념까지.

유년의 동네에서처럼 농담으로 친구를 얻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과 그 시절 읽은 몇 권의 책으로 새로운 세계를 재단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진심이었다.

그럭저럭 일 년이 지나갔다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무난한 캠퍼스 생활을 보냈을 것이다.

사건은 축제를 즈음해서 일어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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