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거장이자 젊은 시절에 노동조합 활동가였고 반핵생태주의자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걸작이다. 중세를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의 대결과 공존을 그린 이 작품은 무서운 재앙신이 되어 인간을 공격하는 멧돼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멧돼지의 도시 출몰과 야생동물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자주 보도된다. 겨울이 되면 도미노처럼 멧돼지가 제목에 들어간 기사가 부쩍 쏟아진다. 길을 잃고 도시로 들어왔다가 출구를 찾지 못해 총살당하는 멧돼지 이야기는 도심에서 난동을 부리다 제압당한 맹수에 관한 뉴스가 된다. 상대적으로 피해가 많은 지방의 뉴스는 농민의 분통과 강력한 대책을 요구하는 기자의 일성으로 마무리된다. 멧돼지만이 아니라 고라니, 까치처럼 많은 야생동물들이 유해조수로 각인되고 ‘공공의 적’으로 지목받는 처지가 되었다.

이틈에 생태파괴와 자연훼손의 공범인 골프장이 입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느 지방자치단체가 유해조수구제 기간을 연장해주었다는 기사도 본 적 있다. 급기야 인기 있는 예능프로그램이 공익을 표방한 생태구조단이란 이름으로 연예인들이 멧돼지를 뒤쫓는 코너를 신설했다가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폐지된 적까지 있다.

 

상점이 쑥대밭이 된 상인과 어렵싸리 가꾼 밭이 망가진 농민은 피해자가 맞다. 고구마 같은 작물을 캐다보면 두더지의 치아 상태를 관찰할 기회를 자주 얻곤 한다. 생업이 아닌 덕에 ‘그래, 너희도 좀 먹어라’하고 일부러 몇 개 남겨두기도 했지만, 농작물이 생계수단인 농민들에겐 심각한 문제가 분명하다. 전문 인력과 장비도 없이 출동하여 부상을 무릅써야 하는 경찰관들 역시 비난받을 대상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유해조수구제라는 명목의 살상과 수렵기간 연장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실상 밀렵 감시가 허가받은 수렵꾼들이 합법적인 사냥감을 보호하는 구조로 운영되는 지역이 있고, 지방자치단체들은 적지 않은 돈을 받고 수렵허가를 내준다. 이런 구조에 의한 결과는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주민이 사냥개에 물리거나 오인사격으로 부상당하는 인명피해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다. 겨울산행에선 멧돼지보다 엽사와 사냥개를 조심해야 할 판국이다. 또 포획남발로 서식지와 가족을 잃은 멧돼지들이 방황하다가 민가로 내려오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사실 그들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살 땅이 너무 좁아서다. 통계를 보자. 연간 멧돼지에 의한 사망자수는 평균 1명 이하이다. 총기 오발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 그런데 연간 자동차에 의한 사망자수는 4000명이 넘는다. 동물들은 어떨까? 연간 로드킬 고라니수는 60,000마리, 연간 로드킬 고양이수는 100,000마리, 연간 로드킬 야생동물수는 1,800,000마리로 추정된다고 한다.

야생동물은 생태계를 파괴한 범인이 아니다. 그들은 몸보신과 가죽을 위해 먹이사슬을 끊어놓지 않았고, 거미줄 같은 도로로 산림을 절단하지 않았고(교통수단이 빨라질수록 생태파괴 속도도 빨라진다), 공놀이를 하겠다고 산을 밀어버리지 않았고, 스키를 타겠다고 산을 통째로 깎아내지 않았고, 치적을 남기겠다고 멀쩡한 강을 뒤집지도 않았다.

 

일종의 고기관리법인 피부 관리 유행기에 건상식이 화두인 건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본래 채식은 자기 몸을 생각하기 이전에 자기 몸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유기농을 찾거나 채식 권장의 깊은 뜻은 개인의 건강이 아니고, 아니어야 한다(오히려 유기농이 위험하다는 주장까지 있다). 자전거를 타는 이유 역시 유가인상과 건강 때문이라면 공허하다.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강변을 뒤엎어 자전거도로를 만들겠다는 발상은 이처럼 철학이 없는 사회에서 가능했다. 더구나 환경문제는 사회구조, 즉 권력문제와도 한 몸이다.

 

자연보호 대신 잔디보호 푯말이 나붙는 조경에 익숙한 세상 속 이기적 환경보호, 심지어 기부도 투자라는 식인 ‘이’로써 설득하는 논리는 개발논리와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생태문제를 배부른 소리로 치부하는 생각 역시 진보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가 이어져 있음을 알아야 자기가 처한 상황이 아니어도 공감하고, 자기가 저지른 일이 아니어도 반성할 수 있다. 다음세대와도 연결되어 있기에 다음세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단절 속에서 다른 생명체들은 단지 살려한 죄로, 멧돼지나 고라니로 태어난 죄로, 감히 인간의 땅에 들어선 죄로 죽어 마땅하다고 한다.

도무지 속도에 관심이 없는 달팽이처럼 다이어트에 무관심한 멧돼지들도 겨울이 되면 자기네 배까지 쌓인 눈을 제설기로 정비하고 먹이를 찾을지, 아니면 등산로와 약수터 주변까지 내려와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뿌려놓은 고구마와 사료를 먹을지 토론한 끝에 대부분은 산 속에 머물기로 의견을 모았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인간사회와 마찬가지로, 많이 먹고 잘 커서 훌륭한 돼지가 되기 전에 길을 잘못 들거나 쫓겨난 친구들이 있다.

 

펜스 설치를 지원하고 피해액을 보상해주는 제도가 있다. 선행국들이 쓰는 방법이다.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 보상에 야생동물에 의한 피해를 포함시키고, 도심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실탄사격 대신 마취생포 후 수용 및 원거리 방사로 전환해야 한다. 당장이 급해 속을 태우는 농민과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주민을 위해선 제한된 사살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같이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구제라는 이름의 살상과 수렵이란 이름의 잔혹한 취미는 임시방편일 뿐이다. 개체 수 조절을 위한 사살은 어쩔 수 없는 현실, 그러니까 필요악에 가깝다. 알면서도 모르고 싶어 하는, 그리고 언젠가는 대안을 마련해야 할 어두운 부분이다. 굳이 공익과 대의를 위한 용감한 투쟁인양 권장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원인을 생략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선정적이고 적대적인 보도에 이어 예능프로까지 나서 야생동물 사냥을 국민스포츠와 오락거리로 만들겠다는 지경을 보고야 말았다.

 

사람들이 흘린 빵 부스러기를 이용해 물고기를 낚는 새들이 있다. 아마 물고기를 마취시킬 수 있는 나무가 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면 새들은 단체로 초피나무 가지를 구하러 다녔을지도 모른다.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무시하지 말라. 물에서 새끼들을 업고 다니며, 헤엄치기 귀찮아 엄마 등에 뛰어오르는 오리 가족과 무엇이 다른가. 문득, 너른 대양에서 나란히 헤엄치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다른 형제들도 어디론가 보내고서 굴비가 되어 누워있는 조기의 눈동자가 쓸쓸해 보인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재앙신이 된 멧돼지는 인간이 쏜 철포에 맞아 괴물로 변했던 것이다.

 

* 메탈 발라드의 자격조건은 대체로 명작에 수록된 B면 마지막 트랙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보면 화이트 라이온(White Lion)‘When The Children Cry’의 출신성분이야말로 이 자격과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킨다. 슬쩍 피상만 보고 1980년대 헤비메탈을 과시성과 마초성에 등치시키는 문외한들이 없지 않지만 실은 탐미성과 서정성이 관통하고 있으며 기교지향도 거기에서 나왔다고 봐야 한다. 청명한 기타 연주를 배경으로 삼은 이 노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슬로우 템포의 메탈 송 중엔, 이를테면 스틸 하트(Steel Heart)‘She’s Gone’처럼, 도저히 원어민이 작사했다고 믿기 힘든 한국 중학영어 수준의 노랫말도 있지만, ‘When The Children Cry’는 존 레논(John Lennon)이 부른 ‘Imagine’1987년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앨범의 꾸밈새를 위한 소품은 훗날 기어코 음악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고전이 된다. 그리고 상상해보라, 인간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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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2009년부터 시작하여 아직도 쓰고 있는 책의 한 부분으로 ‘사회변혁, 녹색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이상한 동네여행기’입니다. 삶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결코 바뀌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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