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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돌아보면 시간은 새롭고 특별한 일 앞에서만 속력을 줄이는 것 같다. 유년이란 핑계를 붙일 수 있는 나이였을 때는 모든 게 새로웠다. 새로운 일이란 곧 서툰 일이고, 서투른 일을 벌이고 있을 때는 좋든 싫든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경쟁프레젠테이션 발표를 준비했던 스물둘의 봄, 인턴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사업계획서를 붙들었던 스물셋의 여름은 물론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오랜만에 깨닫던 봄, 그리고 그 사람과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던 가을날에도 그랬다. 즐거운 날들은 빨리 지나간다고도 하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정신없이 통과해오던 시간들은 그 안에선 분명 느리게 흐른 날들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서툰 일은 줄어든다. 시간 또한 그만큼 빨리 도망가는데, 곧 모든 일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일 똑같아서 익숙한 일만 있다면 인터넷 강의를 빨리 감듯 하루가 지나가 버린다. 나는 스무 살부터 스물넷까지 학원 강사와 과외선생으로 일했다. 똑같은 과목을 가지고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했다.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건들. 그러던 시간은 게임에서 ‘SKIP’ 버튼을 누르듯 의미 없이 흘러갔다.

스물둘 무렵 친하던 동아리의 K형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잠언을 인용했다. ‘사람은 25세에 죽어 75세에 묻힌다.’ 그때 내 아버지의 나이가 74세였으므로 나는 ‘재수 없는 소리를 하고 그러냐’는 반응만 돌려주었다. 그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지금 진짜로 25세가 되었고, 아주 어릴 때처럼 매사가 신기할 나이는 이미 지나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시간을 빨리 흘려보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도 그 와중에 어떤 날은 유난히 선명해서 한나절 전부가 기억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큰 사건이 있을 때가 보통 그렇다. 나는 최근 두 번의 대통령 선거일에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진술할 수 있다. 쫓겨난 전 대통령이 뽑힌 날에는 뉴캐슬 팬클럽 회원들과 충무로에서 만났다. 보쌈을 먹었고, 외출을 준비하며 투표율을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는 일어나자마자 여권을(술 취해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린 게 세 번째였을 것이다) 들고 나가 투표했다. 아버지는 살면서 최초로 ‘누군가 싫어서 다른 누구에게’ 투표했다고 했다. 우리는 함께 중국집에서 깐풍기를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출구조사를 시청했다.

매우 기쁜 일이 있었거나 특별히 괴로운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칼럼을 실어주겠다는 축구 잡지 편집장의 통보를 받은 날, 대학에 합격한 날, 옛날 여자친구가 고백을 받아준 날도 하루 종일 무엇을 했는지 선명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친구와 이별한 날 역시 모두 기억한다. (공식적으로 헤어진 날, 그로부터 일주일 전 사실상 이별을 통보받았던 날, 마지막으로 매달려본 날 이렇게 3일인데, 하루만이라도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다.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쪽팔려서.)

 

*

 

2014년 11월 13일, 처음으로 수능시험을 치른 날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선명한 건 그날의 저녁이다. 수능이란 게 오늘날엔 빛바래져 가는 행사쯤이지만, 적어도 그해 650,747명에게는 유년을 마무리할 좋은 분기점이었다. 그날이 일상처럼 지나가는 날이 아니라는 기분은 부모님에게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외식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낡은 코란도를 타고 중국집에 갔다. 아버지와 둘이 가던 단골 화상(華商)이 아니라 엄마가 권한 새로운 가게였고, 그날 이후 다시는 가지 않았어도 상호만은 여전히 기억난다. 깐풍기를 시켰는데 깐풍기 밑에는 양상추로, 위에는 땅콩으로 장식이 돼 있어 묘한 위화감이 와닿았다는 것도 기억난다. 물론 아버지와 처음으로 나눈 대화도 기억할 수 있다.

– 잘 봤냐?

– 모르겠는데요, 봐야죠…

– 몇 개 틀렸어?

– 채점을 아직 안 해서…

– OO(누나)는 시험 치고 올 때마다 자기가 어디서 뭘 틀렸는지, 몇 개를 틀렸는지 다 알았는데.

– 누나야 뭐…

모른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었다. 누나가 집안의 유일한 서울대 합격자이긴 했지만, 그처럼 공부에 도가 튼 사람만 성적을 가늠해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나. (누나는 지금도 매우 번듯한 삶을 살고 계신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이럴 때 누나 얘기를 꺼내는 데 전혀 불만이 없다. 나는 기대에 못 미쳤고, 앞으로도 기대에 못 미칠 것이며 전통적인 ‘좋은 아들’의 범주에 들어가기 힘들 것이다. 그 반대로 듣는 타박이 이 정도라면 정말 싸게 먹히는 것이다.) 다만 나는 그 느낌이란 걸 직접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 흐려지는 내 말꼬리에서 아버지가 진실의 단서를 찾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내 재수를 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의 어색한 공기도 너무 선연해 그 생각만 하면 몸이 뒤틀릴 지경이다.

*

그러나 재수학원에 등록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터무니없이 상향지원한 H대학 사회과학부에서 뜻밖에 대기 번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더 좋은 데를 가겠다며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실은 날로 다가오는 순번에 손톱이 남아나지 않았었다. 최초합격자 발표에서는 ‘대기 번호 없음’이었다. 1차 추가합격자 발표가 나자 36번, 그다음 날은 19번, 또 그다음은 11번… 참으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입시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초조함이 극으로 치달은 나머지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입시생이 가장 많은 커뮤니티인 네이버의 S카페에서였다. 그 카페에는 H대 사회과학부와 K대 경영학과를 모두 합격해놓고 고민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름값은 H대가 높지만 경영학과 타이틀이 아무래도 유리하니까. 나는 이와 같은 취지로 ‘저 같으면 좀 눈 낮춰서 K대 경영 갑니다. 사회과학 전공해서 뭐하나요. H대 복수전공도 잘 안 시켜준다는데? 어디 고대 그리스에서 취직하실?(그러니 제발 내 앞 순번에서 꺼져줘)’ 따위의 댓글을 달고 다녔던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H대 사회과학부 7번인데 몇 번까지 빠질까요>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쓴 다음날 여론조작으로 영구탈퇴 조치를 받았다. 이런 추잡한 모습을 보인 끝에 순번은 7번에서 멈추고 말았다. 새벽까지 등록 의사를 묻는 전화를 기다리던 나는 끌려가는 심정으로 새벽 6시 반 재수학원 통학버스에 오른 것이다.

*

정말이지 나는 이 빌어먹을 열아홉을 끝내고 싶었다. 이제 스무 살로 진입해서 남들이 하는 만큼을 하고 싶었다. 남들처럼 대학에 가고,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나를 찔리게 만들 내 안의 근성들은 조금쯤 모른 척하고 싶었다. 로빈 윌리엄스의 죽음을 받아들인 게 그 신호라고 생각했다. 내가 변했을 수는 있겠지만 성적이 변한 건 아니었고, 이상만 높으면서 노력에는 무심한 성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

스무 살은 계획에 없는 재수로 시작되었다. 인생이 망했다던 친구들이 어쨌든 대학에 다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겨울밤의 엄동 속에서 막차를 놓쳤을까 불안해하는 승객처럼 머리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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