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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물론 그렇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편과 그렇지 못한 편으로 나뉜다. 상대편과 싸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선이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성이 강자, 여성은 약자다. 바꿔 말하면 남성이 역사적 가해자이며 여성은 피해자의 편에 가깝다. 이를 부정할 사람도 없다. 약자는 선하고 강자는 악하다는 관념이 언더도그마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뉴스의 어지간한 이슈에서 건물주, 가해자, 남성보다 세입자, 피해자, 여성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절대선이어서가 아니다. 전자 쪽의 목소리는 이미 많이 들려왔던 것이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는 것이며, 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체성은 성별로만 규정할 수 없다. 권력의 잣대는 너무나 많다. 성별은 중요하고 섬세하게 다뤄야 할 잣대다. 그러나 부(富), 학벌, 외모, 다수와 소수, 인종, (좁은 의미의)정치적 권력 같은 것도 있다. 모두가 이 사회에 작용하는 권력의 기준이다.

한 사람은 복수의 계층을 가진다. 가난하고 학벌도 보잘 것 없는 노동계급 남성과 사무직에 종사하는 부유한 여성 둘 가운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둘 가운데 누가, 언제나, 어디서나 절대적인 강자이거나 약자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사회에서 더 인정받을 사람은 부유한 여성이다. 그러나 인적 드문 밤 골목에서 약자 입장에 서는 것 역시 그녀일 것이다. 하층계급 남성도 마찬가지다. 일터에서 구두나 치마를 입고 외모를 꾸미는 노동에 시간을 지출하지 않는 건 권력이다. 그러나 그가 은행 대출 창구나 채권추심원의 방문 앞에서도 강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사가 그렇게 딱딱 떨어지고, 있는 그대로 사고할 수만은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나는 빈자의 입장에 서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강한 빈자’나 ‘어쩔 때는 약한 부자’ 같은 개념을 매끄럽게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방어기제와 같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돈이 없을 때는 체크카드 잔액과 자신감이 동기화되는 것 같단 말이다. 잔액이 빠져나가는 걸 계산할수록 자괴감에 빠져든다. 하루하루가 민감하고, 계획에 없는 일(이란 주로 지출이니까)을 겪는 것이 살얼음판 같다. 그럴 때 자기의 어느 단면이 강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돈이 권력인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해?’ 삶 대부분을 그렇게 지내왔다면 계급에 얽힌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다. 여성들도 비슷할 것이라 짐작된다. 여성이라는 위치에 서 있다면 남성을 어떤 부분에서든 약자라고 궁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유아인을 공격한 이들이 여성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이 유아인의 트윗에 민감해한 원인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뿌리 깊은 차별과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엄중한 사실일 것이다. ‘애호박으로 맞아봤음?’이 정말로 무의식에 새겨진 트라우마를 자극했을 수도 있다. 그 발언이 여성혐오성 발언인가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인터넷의 여성 여론 가운데서도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또한 남성이 가지는 오만일 수도 있다. 여성이란 집단은 일단 약자다. 그리고 약자 집단이 지닌 정신적 외상이 있다면 그건 이성으로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개개인의 상처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유아인이 남성이란 권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트위터 논쟁의 구도가 오로지 ‘남성과 여성’은 아니었던 것도 분명하다. ‘절대다수의 트위터 이용자 대 유아인’이기도 했고, ‘절대다수의 트위터 이용자와 그들의 편에 선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 대 유아인’이기도 했으며, 바꿔 말하면 ‘단체로 유아인의 인신을 공격하고 <사도>와 <완득이>의 영화 별점을 깎는 이들 대 유아인’이기도 했다. 목소리 큰 다수의 공격을 받는 소수의 입장이었던 것이다. 

단지 여성이 약자라는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옹호하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모든 것’에는 조직적으로 그를 정신병자나 한남으로 매도하는 댓글과 트윗을 달고, 그를 옹호하는 쪽도 비난하며, 그가 출연한 영화의 네티즌 평점을 깎는 것이 포함된다. 유아인이 그들의 한을 푸는 제물이 되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또 다른 폭력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다수라는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약자임을 계속해서 자임하는 꼴이었다.

유아인 죽이기가 여성인권을 위한 험난한 과정이라고 여겨졌다면 더욱 문제다. ‘우리가 세우려는 이상세계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구현되어 있어야 한다’.1 애호박 사건은 과정의 하나였다. 이 나라의 수많은 권력관계 중 성별에만 천착해 온.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트랜스젠더 한 명이 비난을 못 견뎌 여자대학 입학을 포기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타겟이 유명인에서 성소수자로 바뀌었을 뿐 양상은 똑 닮았다.

이것이 약자를 자처하는 자기연민의 결과라면, 가장 나쁜 형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계속

 

1 진중권, <“저는 사실 여성”이라던 박원순의 죽음, 진보 전체의 죽음이다>, 한국일보,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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