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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담담하고 유쾌하게 걸어가는 청춘실패담

매주 월,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6.

단지 돈이 없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대단히 옹졸해질 수 있다. 빈 지갑은 그저 지갑이 아니다. 무의미한 통장 잔고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감싸는 토템과도 같은 것이다. 술에도 치킨에도 의지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수동에선 웃을 일이 줄어들었다. 밖으로 개선의 여지가 없던 생활이 인내를 시험했다. 속에서는 울화와 좌절감이 끓어올랐다. 회복을 위해서 건강하게 대응할 면역력은 바닥나 있었다. 교수님의 정치학 이론으로 말하자면, 물질적 여유란 행동에서 나타나는 여유의 제일 유의미한 독립 변수였다. 더불어 그해 여름 서울은 관측 이래 가장 더웠다. 훌륭한 매개 변수였다.

형들은 더러움에 대한 역치가 지나치게 높았다. 엄마의 결벽을 물려받아 청소가 습관인 나와 정반대였다. S형은 12평짜리 쓰리룸에서 고양이 네 마리를 키웠다. 지금도 유기묘를 데려온 S형의 선함을 존경한다. 귀여웠다는 것도 인정한다. 거실 의자와 주방 싱크대는 물론 마룻바닥 곳곳에 털을 묻혀놓는 건 웃음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일도 많았다. 발수건에 오줌을 싸 놓을 때부터였다. 내가 질색하자 S형은 평생 발수건을 써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걸 꼭 써야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형은 본가에 내려가 오랫동안 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내 출근이 점점 의미가 없어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양이를 두고 간다는 게 문제였다. 배설물이 쌓였고, 그 친구들의 화장실은 거실에 있었다. S형이 집에 있을 때도 내가 몇 번 재촉해야 겨우 한 번 화장실을 치우는 수준이었다. 고양이 배설물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건 살림집에서 나야 하는 냄새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쓰리룸의 창이 북으로 나 있다는 걸 여름이 되어서야 알았다. 열대야에 홑이불은 땀띠만 났다. 곧장 누운 장판에 허벅지가 쩍 달라붙었다. 거실에 그나마 바람이 통했으나 문을 열어놓을 수는 없었다. 유유히 들어와 옷과 이불에 털을 묻히고 떠나는 고양이들 때문이었다. 검은색투성이인 내 옷들에 가장 많이 몸을 비비는 건 ‘라떼’란 이름의 하얀 친구였다. 쓰리룸엔 당연히 에어컨 옵션이 없었다. 백화점 일당을 받자마자 선풍기를 사 왔다. 강 건너 영등포 이마트에서 가장 저렴하던 ‘브랜드 없는’ 선풍기였다. 땀이 찬 대퇴부 햄스트링을 교대로 말릴 수 있었다. 그런데 선풍기는 뜻밖에 두 대가 되었다. 여유가 생겨서는 아니었다. 주말 동안 수원에 내려갔다 왔는데 선풍기에 하얀 털이 온통 묻어 있었다. S형이 말없이 방에서 쓰고 갖다 놓은 건데, 선풍기를 캣타워 삼아 몸을 비빈 라떼 덕이었다. 거실에 똬리를 튼 라떼란 놈의 볼때기가 참으로 얄밉게 퉁퉁했다. 얘 진짜 닉값 하네요. 농담이라고 했지만 표정은 썩은 채였다. 형 그냥 이거 쓰세요. 이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형은 다음날 새 선풍기를 사 주었다.

어느 날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다. 수도세 3만 원을 달라는 것이었다. 다세대주택은 종종 주인집에서 수도세를 모두 내고 세입자들이 현금으로 이를 갹출한다. 나는 이런 관행을 잘 몰랐다. 동거인들에게 물어보고 전화 드릴게요, 라고 끊으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답답해했다. 그 두 사람이 지금 한 달째 전화를 안 받는데 뭘 물어봐요? 형들은 집주인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고 내가 그 전화를 떠안은 거였다. 그 뒤로 하루에 서너 번씩 독촉 전화를 받았다. S형은 돈이 없다고 했다. 형은 매주 두 번 이상 자차로 경기도 남부에 있는 본가를 오갔다. 기름값만 해도 3만 원이 넘었을 텐데 그땐 따지지 못했다. 나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3만 원이 아니라 3천 원도 가물거리는 마당이었다. 보름여가 흘렀다. 피부과 홍보영상을 편집하다 새벽에 잠이 들었다. 아침 일곱 시인가 전화가 울렸다. 집주인이었다. 벌컥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쩌라는 거예요, 돈이 있어야 줄 거 아니에요!”

전화 너머로 집주인이 말을 못 잇던 게 생각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에 빠져 창밖이 파랗게 어두워질 때쯤 일어났다. 후회했다. 언성을 높이는 버릇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고 싶지 않았던 단 하나였다. 주인아주머니가 다시 나에게 전화하는 일은 없었다. 아직도 그 수도세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른다.

실수라고 하긴 어렵다. 상수동 집주인에게만 성질을 돋운 것도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간신히 잡힌 과외 시범 수업이 있었다. 면목동의 여학생이었다. 학생은 만족시켰는데 그 아버지가 나를 탐탁치 않게 봤다. 내가 대학생이라는 걸 알고 이것저것 트집을 잡았다. 대학생 선생들이 대체로 불성실해요, 남자 선생들이 여학생이랑 수업하면 좀 껄떡거리던데, 같은 말은 참을 수 있었다. 본래 아쉬운 사람들은 벌어먹기와 빌어먹기란 획 하나 차이라고 생각해야 편안한 것이니까. 액수가 문제였다. 중개 업체의 설명으로는 40만 원짜리 수업이었다. 그는 다시 대학생을 들먹이며 30만 원으로 하자고 했다. 요새 같을 때 과외도 잘 없잖아요? 이때 나는 눈앞에 있던 연필깎이를 집어 던져버렸다. 연필을 쓰지 않는지 연필깎이는 찌꺼기 없이 깔끔하게 부서졌다. 그럼 30만 원으로 하자는 놈 구하세요.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왔다. 다행히 도어락은 버튼만 누르면 됐다. 버벅일 것 없이 도망치듯 아파트를 내려왔다. 속 시원함은 잠시였다. 격노하면 물건을 던지는 버릇, 이 또한 아버지의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이 회사에서는 절대 수업을 구할 수 없을 것이었고, 30만원은 연필깎이와 함께 허공에 날아갔다. 그리고 그래 봐야 돌아갈 곳은 열대야 속 고양이 똥 냄새가 진동하는 쓰리룸이었다.

곤궁은 감정 조절을 어렵게 했다. 그렇지만 내 본성이 그렇지 않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여유가 있었으면 좀 달랐을 텐데… 따위로 생각한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수도세 까짓거 그냥 낼 수 있었다면 이성을 잃을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진정 지갑이 여유로운 시절은 생에 거의 없었다. 평생 토템 탓만 하며 산다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여유, 포용, 배포 같은 인간다운 미덕은 힘들고 어려운 일에 몰려 있을 때 발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S형이 마냥 무책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궁하기로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집이 부유하긴 했다. 매달 수백만 원의 용돈은 받을 수 있으나 가족과 얽힌 모종의 이유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했다. 어쩌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다. 내가 돈을 못 받아야 형의 독립심이 지켜진다는 건가? 곡절이야 무어건 셋이 합쳐 치킨 한 마리 못 시키던 날들이었다. 월급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차, S형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파주 운정신도시에 있는 영어학원에 안면을 터놨는데, 장사가 안돼서 강의실을 놀린대. 월 35만 원만 주면 강의실 하나를 마음대로 쓰게 해 주겠대. 나는 영어를 하고, 너는 고등학생들 사회탐구로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파주? 너무 멀지 않아요?”

“파주라지만 일산에 가까운 파주고, 상수에서 외곽순환도로 타고 안 막히면 30분이면 가. 내가 차로 태워다 주면 되지 않을까?”

거기서 강의를 하고 돈을 번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너무 멀었다. 상수에서 파주까지 30분이란 건 새벽에나 가능했다. 상수에서 서울 안 K대로 출근하는 길도 막히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긴다. 더구나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파주였다. 차로 가려면 형과 나의 시간이 완벽히 들어맞아야 했다. 학생들이 우리가 편한 시간에 뚝딱 맞춰줄 리도 없었다. 전혀 모르는 지역에서 맨몸으로 수업을 유치하는 일도 문제였다. 형은 맘카페를 이용하거나 현수막을 달고, 리플렛이나 전단지를 만들어 홍보하자고 했지만 다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한두 달 새 낯선 동네에 입소문을 낼 재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하지만 형의 의지가 확실했다. 며칠 뒤 밤에 파주로 향했다. 학원과 주변 상권을 답사하고 전단지를 붙였다.

“이거 봐, 운정까지 30분 걸리네.”

새벽 세 시, S형의 차로 자유로를 달렸다. 우리 말고는 다니는 차가 없었다. 창문을 열면 격하게 퍼덕이는 굉음을 내는 자유로는 시원하기만 했다. 창틀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바람을 맞는 것이 좋았다. 간만의 기분 전환이었다. 전날 혼자서 만나본 원장은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나도 동의했기에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었으나 이 순간이 합리적 걱정을 다 날려버렸다.

S형은 동네 곳곳에 뿌릴 리플렛을 만들자고 했다. 내가 디자인 툴을 써서 3단 리플렛을 만들었다. 광고를 공부하는 동안 눈높이는 생겨서 리플렛은 어지간한 프랜차이즈 학원 홍보물 정도의 질은 됐다. 리플렛에는 나와 S형의 경력이 대단히 과장되어 들어가 있었다. ‘분당과 수지를 평정한 사회탐구 특급 강사’가 나를 수식했다. 물론 내가 쓴 거다. 마지막 장에는 전화번호와 함께 ‘교육그룹 프로메테우스’로 방점을 찍었다. 교육그룹이라니, 합쳐서 얼치기 강사 노릇 몇 번에 불과한 사실상 백수 그룹이 실체인데 말이다. 지금 봐도 모양은 그럴싸한 것이 그 시절 우리 처지를 상징하는 물건 같다. 디테일은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비극인데 큰 그림만은 기가 막힌 희극이다.

학원과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강의실을 사용하는 게 일주일 뒤부터였다. 빨리 인쇄를 해야 했다. (어디에 어떻게 배포한다는 계획도 없었지만.) S형에게 전화해 입금을 부탁했다. S형은 몇 시간 뒤 돈을 보냈다. 그런데 어쩐지 머뭇거리는 목소리였다. 그게 마음에 걸렸으나 금방 잊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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