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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유라시아 횡단기 #11] 모스크바는 어땠니


격랑은 갔다. 차르의 대관식은 열리지 않는다. 한때 이 도시는 몽상의 현신이었다. 코민테른의 수도요 제2 세계의 심장이었다. 노동자의 피에 눈물짓고 그들을 위한 세상을 궁구했던 사상가들이 여기 살았다. 깃발 밑에서 머리띠를 매고 목청을 소모한 투사들도 있었다. 러시아 민중은 그들에게 혁명의 완성을 청부했다. 윤전기와 전차와 공장을 멈추더니 삼백 년 제정을 보름 만에 뒤엎은 직후였다. 그러나 도급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도 주먹을 치키지 않는다. 퍼레이드가 있는 전승(戰勝)절에만 광장은 북적이는데, 대관절 누가 누굴 이겼다는 건지 모른다.

어쨌든 백 년이 흘렀다. 이름을 대라면 누구라도 모스크바라 할 터이나, 그 주인은 누구인가?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속에서 그친 물음은 티를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붉은 광장은 그런 식으로, 어리숙한 여행자에게 입장료 대신 얼마의 쌉쌀한 사색을 청구했다. 방금 전 이십여 분 만에 비둘기와 사기꾼과 선한 청년을 모두 구경한 값이 일천 루블이었던가. 그 생각을 하면 가난한 객(客)에게는 고마운 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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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시베리아보다 훨씬 덜 추웠지만, 그래봤자 영하 20도 안팎이었던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방심하고 코트를 입었던 필자는 털목도리 하나에 의지해야 했다.]


모두 사라지진 않았지만 많은 것이 변했으리라. 알고 보면 빨갛지도 않은 광장에는 가설 스케이트장과 놀이동산이 들어왔다. 벽돌을 깐 바닥이 여기저기 패여 있거나, 그랬을 법한 곳에 아스팔트로 땜질을 했다. 입구에 참으로 많았던 중국인 관광객들은 유물이 된 유산에 찬탄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여전히 있어 그나마 면이 선다.

그리고 크렘린 궁이 있다. 몇 루블이 입장료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금방 줄어드는 줄 끝에서 역시 몸을 탐색하고 가방을 보여준다. 하얀 빛의 성당이 여럿 있다. 회교도 정교도 잘 모르는 우리는 그 안을 금방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군인들이 구석구석 서서 특정 구역의 출입을 통제한다. 이를테면 팜플렛의 지도에서 제일 흥미로웠던 ‘Arsenal(무기고)’이 그랬다. 그런 식으로 관광객을 막아서는 건물 어딘가는 투표함을 오로지하는 가짜 차르가 틀어 앉은 곳이겠지.

겨울 내내 회색이었을 하늘, 그 아래를 빤히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착잡해진다. 그러나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흐린 도시에도 엷은 웃음이 띤다. 천진하게 선 ‘성 바실리 성당’ 때문이다. 도무지 미워할 수 없을 듯 발랄한 양파 모양의 성당. 사실은 이 도시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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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성 바실리 성당. 사진이 담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졌다.]


성당은 광장의 남동쪽 초입에 있다. 가장자리다. 본의 아니게 수백 년의 역사를 관망했을 것이다. 하기는 한가운데보단 주변부에 있어야 관조도 통찰도 쉽지 않을까. 광장의 벽돌들은 열병식의 숱한 군홧발을 감내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생채기가 났고, 또 때워졌고, 겨울엔 인공 빙판에 깔린다. 크렘린은 또 어떤가. 하루가 다르게 황제며 서기장이며 대통령을 바꿔 모셨다. 스스로 반성은커녕 반추나 회상을 펼쳐놓을 일말의 틈이 없다. 중심에 있을 때의 숙명은 그런 것이고, 거기서 비껴 모든 나날을 오롯이 내려다보는 위치에 성당은 있었다. 끼어들지 않아야 객관이 된다…

그러나 어설픈 귀납은 적당히 그만두기로 했다. 붉은 광장의 가장자리라고 해봤자 이 메트로폴리스의 한복판임엔 틀림이 없지 않은가. 모스크바에선 해괴한 비약을 일삼는 버릇이 더 세졌다. 다른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다. 정신없이 추위를 견디던 시베리아는 이미 건너와 버렸고, 여행이 지날수록 그림자가 짙어졌다. 사실 바이칼의 넓이를 실감하거나 기차에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에도 현실은 이따금 파고들었다. 사실, 사기단과 싸우거나 택시비를 흥정하는 사건은 일면 고맙기도 했다. 당장 닥친 일로 머리를 가득 채우는 일은 그때의 나에게는 귀했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정말 ‘관광’이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사진을 찍고, 너무 추울 때는 카페에서 지나간 여자 친구들 얘기를 했다. 점심은 거의 햄버거로 때웠지만, 안락한 아파트에서 저녁을 직접 해 먹었다. 이게 하루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니, 정말 외로운 일 년을 더 보내야 하는 거냐는, 생각이 틈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어영부영 사흘을 보냈다. 임시방편을 대강 만들 수 있는 기간이다. 술이나 저녁을 푸지게 먹고 늘어지게 자는 것으로 버틸 수 있다. 기상하면 ‘로딩’되는 내 처지를 아침마다 발견해야 하긴 했지만.

떠나는 날이 왔다. 그렇게 예쁘다는 붉은 광장의 야경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전날 ‘참새 공원’을 찾아 헤매느라 오후를 꼬박 썼고, 또 그 전날엔 고리끼 공원에서 스케이트를 탔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을 내려면 냈겠지만, 식사와 음주를 거르고 갈 것이야 있냐는 게 네 명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서른 전에는 또 오지 않겠냐는 것도 일치된 의견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머리가 넷이나 돼도 꼭 합리적인 판단을 기대할 이유는 없다.

주인에게 반납할 열쇠를 찾고 캐리어를 정리하니 체크아웃 시간이 됐다. 도모데도보(Domodedovo, Домоде́дово) 공항까지 태워다 줄 픽업 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저분한 아파트 꼴이 마음에 걸리던 찰나, 문자 메시지가 왔다. 로밍할 돈도 끌어다 여비에 보탰기에 좀처럼 울리지 않던 휴대폰이었다.

여든 자를 꽉 채웠으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최종 합격하셨습니다.’

오늘이 발표랬나? 아니었지만, 입학처에 확인을 하니 합격이 맞다고 했다. 정말 가긴 가는구나. 대학에 가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가끔 그리곤 했다. 엄마 생각도 나고 아버지 생각도 나고 눈물도 날 줄 알았다. 그런데 다 아니었다. 신나 날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간의 애환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안도했고, 다행이었다. 살얼음판을 걷다가 이제 막 땅을 디뎠다.

여행의 동료들이 함께 머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나보다도 나를 걱정했던 친구들이다. 나는 내가 ‘잘 되는’ 것만 염려했었다. 하지만 녀석들은 짜증이 늘고 곧잘 인상을 쓰게 된 인간 이용규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서 친구들을 둘러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뜻밖에 그런 감정이 합격의 순간을 채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상은 간다. 택시로 금방 공항에 닿았다. 가방을 내리고 약속된 이천오백 루블을 냈다. 다시 검색대를 지나고 가방을 열어 보이는 의례를 치렀다. 그렇게 물 흐르듯,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나흘, 말도 공기도 낯선 곳에선 짧은 시간이다. 이 ‘주인은 알 수 없으되’ 묵직한 역사를 가진 곳을 정의하기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누군가, 모스크바는 어땠니, 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어떤 생각이든 덩어리로 만드는 도시, 뜻밖의 경험을 뜻밖의 감정으로 겪었던 묘한 도시.

적어도 2016년 1월 말에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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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레닌 묘. 우리가 간 날은 입장을 통제했다. 뒤로 크렘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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