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12] 뻬쩨르

[그 해 겨울 #12] 뻬쩨르

뻬쩨르 우리는 생각보다도 넓은 땅을 휘저었다. 동시베리아의 설원이나 바이칼 반대편 산맥을 지켜볼 때는 잘 몰랐다. 대륙의 규모를 실감케 해 준 것은 공항에 내릴 때마다 휙휙 바뀌는 날씨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눈보라를 맞았지만 바이칼에서는 시리도록 푸른 햇빛을 쬈고, 모스크바에서는 재색 하늘에 질렸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만에 … 더 보기 →
[그 해 겨울 #11] 모스크바는 어땠니

[그 해 겨울 #11] 모스크바는 어땠니

모스크바는 어땠니 격랑은 갔다. 차르의 대관식은 열리지 않는다. 한때 이 도시는 몽상의 현신이었다. 코민테른의 수도요 제2 세계의 심장이었다. 노동자의 피에 눈물짓고 그들을 위한 세상을 궁구했던 사상가들이 여기 살았다. 깃발 밑에서 머리띠를 매고 목청을 소모한 투사들도 있었다. 러시아 민중은 그들에게 혁명의 완성을 청부했다. 윤전기와 전차와 … 더 보기 →
[그 해 겨울 #10] 비싼 수업료를 내다

[그 해 겨울 #10] 비싼 수업료를 내다

비싼 수업료를 내다 우리가 사흘을 묵게 될 아파트의 공동현관은 밖에서 자석으로 된 키를 대야 열렸다. 그 철문은 기차역에서 본 것처럼 무거웠지만, 닫힐 때의 마찰음은 없었다. 이끼 같은 녹색 페인트에 이따금 녹이 슨 듯 붉은 빛이 돌았다. 만지기만 해도 파상풍을 앓을 것만 같았다. 그 문을 … 더 보기 →
[그 해 겨울 #9] 잿빛 도시

[그 해 겨울 #9] 잿빛 도시

잿빛 도시 못난 마음이 안으로 향하고, 그 껍데기를 열등감으로 감싸는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런 이들은 보통 스스로의 모양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 탄로 나는 것을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말이 많은 사람은 흔히 사교적인 사람이라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 결코 잘나지 않은 속내를 … 더 보기 →
[그 해 겨울 #8] 어영부영

[그 해 겨울 #8] 어영부영

어영부영 여행을 왜 다녀왔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그러면 나는 으레 ‘재수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가…’ 로 시작하는 길고 지루한 얘기를 한다. 물론 알고 있다, 그게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닐 거라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궁색한 대답이라는 것을. 한 번도 대한 적은 없지만, 여행에서 뭘 얻었느냐고 … 더 보기 →
[그 해 겨울 #7] 별들 많던가요?

[그 해 겨울 #7] 별들 많던가요?

   별들 많던가요? 유럽을 다녀온 이후 여행 이야기는 나의 주된 레퍼토리로 편입되었다. 물론 ‘1회, 22일’이라는 해외여행 누적 스탯은 누구와 견줘도 빈곤한 편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야 했지만. 어쨌든 시베리아를 다녀왔다는 얘기를 하면 썩 괜찮은 반응이 돌아오고는 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시덥잖은 소리를 매번 늘어놓다, 언젠가 받았던 … 더 보기 →
[그 해 겨울 #6] 잠시 서행(西行)을 멈추고

[그 해 겨울 #6] 잠시 서행(西行)을 멈추고

잠시 서행(西行)을 멈추고 겨울의 여행은 휴양보다는 체험에 가까웠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언가를 자꾸 겪어야 한다는 것이 좋은 점이었다. 마음은 낯선 공기에 맡겼지만, 어디로 팔려가도 소문 없이 사라질 몸뚱이에 바짝 힘을 줘야 했다. 행로를 정하고 여비를 계산하고 추위를 피하면서 뭔지 모를 음식을 맛보는 사이 정신없이 … 더 보기 →
[그 해 겨울 #5] 침대칸

[그 해 겨울 #5] 침대칸

침대칸 익숙한 노래에서 생소한 음(音)을 느낄 때가 있다. 보컬이 전하는 가사를 따라가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 어떤 음악이든 목소리의 배경에는 필경 짤랑거리는 기타의 마찰음이 있기 마련이다. 귀에 익은 후렴구 뒤에서 들려오는 리프를 어떤 동기도 없이 발견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그런 것은 마음먹고 찾으려면 찾아지지 않기 … 더 보기 →
[그 해 겨울 #4] ‘첫 아침’

[그 해 겨울 #4] ‘첫 아침’

‘첫 아침’ 된소리 하나 없는, ‘눈보라’라는 말은 참 예쁘다. 낱말만 놓고는 휘몰아치는 눈이나 살을 에는 바람이 도저히 떠올려지지가 않는다. 기구한 운명처럼 변화무쌍한 사계를 타고난 한반도였다. 그럼에도 평화를 사랑했던 우리 선조들은 날씨에 부드럽고 예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일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측건대, 그것은 남도의 어디쯤에 … 더 보기 →
[그 해 겨울 #3] 연해주의 밤

[그 해 겨울 #3] 연해주의 밤

연해주의 밤 남학생들보단, 여학생들로 북적이던 오전이었다. 이미지 사진을 주업으로 하는 번화가의 ‘스튜디오’가 으레 그렇듯이. 모두 증명사진이 필요했다. 한 녀석은 만료 직전의 여권을 갱신해야 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여권을 처음 만들었다. 사진을 잘라주던 직원이 “같이 여행 가시나 봐요.”라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되물으려다 … 더 보기 →